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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

이런 일들을 하고 있습니다.

by 적일행 2020. 2. 14.

나는 변호사라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큰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자격증이 없으면 언젠가 기댈 곳이 없어질까봐 무서운 마음이 있었고, 학교 다닐 때에는 기업/경제활동이 나와 너무 먼 일처럼 느껴져서 돈 버는 일을 유예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습니다.  바로 사회로 나가려니 부족하고, 다른 사람에게 인정 받기 쉬운 직업을 가지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로스쿨로 향해서 변호사가 되었고, 작다면 작고 크다면 큰 그런 로펌의 변호사가 되었습니다.

 

 

변호사가 다 그렇지는 않겠지만, 많은 변호사들은 회사에서 일하면서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고, 회사 동료들과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냅니다. 농담처럼 옆방 변호사님과 하는 말, "우리 누나보다 변호사님을 더 자주 봐요.", "4끼 연속 변호사님이랑 먹네요."

 

일이 나의 삶에서 차지하는 시간도 너무나도 많고, 내 희/노/애/락 4가지 감정과 관련된 때도 너무나 많습니다.  하루 중 가장 기쁜 순간은 아직 일을 착수 안했는데 그 일이 사라질 때, 혹은 내가 한 일에 대하여 고객/선배가 너무나 만족 했을 때.  하루 중 가장 화가 나는 순간은 누군가 일을 묵히다가 망친 채로 주었을 때, 혹은 말도 안되는 무리한 요구들이 쏟아질 때.  하루 중 가장 슬픈 순간은 해도 해도 일이 조금도 줄어들지 않고 그대로 쌓여 있을 때, 혹은 너무나 선한 고객이 선함으로만 해결할 수 없는 순간을 맞닥뜨렸을 때. 가장 즐거울 때는 일이 성사되었을 때, 성과급을 받았을 때, 혹은 오늘은 그냥 내던지고 집에 가도 될 때.

 

일에 대한 불만과 증오, 일에 대한 사랑과 잘하고 싶은 마음이 복잡하게 뒤엉켜서 질척하게 마음 곳곳에 달라 붙습니다.  어떤 감정들은 일이 너무 싫어서 생기는 감정인데 동시에 또 어떤 감정들은 일을 좋아하고 일을 잘하고 싶어서 생기는 감정들입니다.  양가적인 감정이 나를 휩싸고 내 정신도 그에 따라 널뜁니다. 스스로를 돌봐주지 않으면 금세 지치고, 냉소적이 되어 모든 것에 의욕을 잃고,  못된 사람이 됩니다. 

 

나는 자문 변호사라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로스쿨에 가게 된 가장 주요한 이유 중 하나는 "미국드라마"였습니다. 미드를 보면 기가 막히게 멋진 변론으로 한 방 먹이는 변호사들이 나오잖아요. 애석하게도 모든 변호사가 소송을 하지는 않고, 또 우리나라 법정은 미국 드라마와는 판이하게 달라서 그렇게 멋진 변론으로 한방 먹일 기회는 대부분의 변호사에게 어쩌다 생길까 말까한 일입니다. 

 

 

그리고 일정 규모 이상의 로펌 또는 특정 분야를 주로 하는 부띠끄 로펌에서는 소송 업무를 거의 하지 않는 변호사가 생깁니다. 네, 바로 제가 그런 변호사, 바로 "자문 변호사"입니다.  소송은 처음 변호사를 시작할 때 5-6건 정도 바짝했고  지금은 직접 소송하는 경우는 잘 없습니다(다니고 있는 법무법인이 규모가 있으니, 다른 변호사들이 소송을 대신 해줍니다. 얼마나 좋은가!). 소송을 안하면 무엇을 하냐고요? 계약서를 쓰고 거래 구조를 짜고 소송 말고 행정 처분 단계를 대응하거나 끊임없는 페이퍼워크에 파묻혀 있습니다. 주로 하는 분야는 M&A와 기업법무입니다. 굉장히 있어 보이는 단어이지만, 다른 변호사들은 잘 압니다 - 이 "기업법무"가 얼마나 넓고, 세분화된 분야에 전문가도 너무 많고, 그래서 "M&A와 기업법무"를 주로 한다는 것은 사실 소송 빼고 그냥 다 한다는 말과 거의 같은 말이라는 것을요. 그 덕분에 어떤 때는 고객이 원하는 바를 처음부터 끝까지 대략적으로 조망할 수 있지만, 또 어떤 때는 세부 분야의 전문성이 부족한 기분이 들어서 괴로워합니다. 

 

지인 중 사업을 하지 않거나 기업에서 법무/기획 업무를 담당하지 않는 지인의 질문에는 거의 답할 수가 없습니다. 상속, 모릅니다. 제가 물려받을 재산이 없어서 더 안 봤습니다. 교통사고, 그것도 모릅니다. 제가 운전을 안해서 학교 다닐 때 공부한 이후로 다시 못 열어 봤습니다. 형사사건, 그것도 모릅니다.  다행히 아직 죄를 안 지어서 변호사 자격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대신에 제가 다니는 법인의 다른 변호사들이 이러한 일을 할 줄 아니, 저에게 법률 사건을 맡기시기로 한 때에는 그분들의 도움을 받죠. 

 

나는 이런 일들을 하고 있고,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제가 하는 일들은 주로 이렇습니다. 계약서 쓰기, 계약서에 따라서 일어날 일들에 대한 법률 검토(상상력 초 발휘!!), 기업이 투자를 받거나 운영 과정에서 생길 수 있는 이슈 검토, 합병/분할/분할합병/영업양수도, 가끔 인사노무 검토 등등. 학교 다닐 땐 단 한 번도 내가 이 일을 할 줄은 몰랐습니다. 주가를 볼 줄도 모르고, 회계도 몰랐습니다. 투자 관련 용어도 전혀 모릅니다. 이제는 조금 아는 척 할 수 있게 되었고, 몰라도 나중에 찾아보(거나 고객이 안보는 사이에 재빠르게 스마트폰 검색을 해보)면 된다는 것도 압니다. 

 

기왕 이렇게 일을 하게 된 것 일을 잘하고 싶습니다. 지금도 큰 뜻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일은 너무 괴롭고 하기 싫습니다(아까 잘하고 싶다고 했는데, 사실은 안할 수 있으면 안하고 싶...). 그렇지만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일하고(재벌가에서 태어나지를 못했으니), 일 생각만 하고, 쉴 때도 일 이야기하고(주로 불만이지만) 술 먹고 일에 대한 불평을 하고 있는데....아무래도 이번 생은 일과는 애증 관계인 듯하니 저도 일이랑 조금 더 친해지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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