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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K/나의 변호사 생활기: jot down

복귀일기 2탄 - 30중반의 커리어

by 적일행 2023. 11. 6.

1. 한동안 미친 사람처럼 긍정! 약속! 가즈아! 모드로 다니다가 탈이 났다. 수많은 공수표와 공언과 약속 속에서 하나 두 개 쌓인 꾸러미들이 한 번에 나에게 던져졌고 빵!하고 터져버렸음. 며칠 무리를 했는데, 그 무리를 한 시간보다 더 긴 시간이 들어서도 회복을 못하고 있다(그래봤자 그 모든 감정이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은 고작 1주일 사이. 아아 어쩌랴 자문변호사의 삶이여). 신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나이를 먹었나 보다. 회복의 힘이 많이 떨어짐.

 

회복을 못하니까 우울해지고 쳐진다. 지금 쳐지고 우울한 것은 지난 주에 "도저히 모르겠고 답이 없는" 의견을 얼레벌레 엮어서 보내면서 이러다가 제재처분 받으면 어쩌지 싶고 불안한 마음 때문. 아직도 간은 작고 좁고, 답은 잘 모르겠다. 어렵다. 이렇게 지나도 어렵다. 갑갑하고 묵직한 마음.  바쁨이 줄어들었는데도 집이 지저분하고 너저분하다.  휴대폰을 길에서 떨어 뜨려서 핸드폰 액정이 깨졌다. 1월에 휴대폰을 바꿀 예정이라 어찌 보면 또 금방인데, 그냥 한심한 시간대의 나를 보여주는 것 같아서 또 한 번 우울(이걸 가리려고 액정 스티커를 황급히 주문했다). 원래 이런 때에는 집도 정갈히 하고 운동도 하고 걷기도 해야 하는데, 날씨도 비협조적이고 몸뚱아리도 비협조적이네. 

 

 

 

발표자료도 준비해야 하는데 역시나 새로운 영역에 헛발질하는 기분. 예전에 C 변호사님이, 자기는 안 해본 일 하는 것이 스트레스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때는 그 이유를 잘 몰랐다. 나는 그때 새로운 거 해보는게 재미있었는데...생각해보니 C변호사님 같은 분이 내 앞에서 방패막이로 서 있어서 그랬던듯. 지금은 앞에 서 있는 C변호사님이 내가 되어야 하니 괴롭소이다. 

 

2. 언제나 참 좋아하고 허례허식 없는 K선배와 밥을 먹었다. 나이와 상관 없이 늘 긍정적이고 참 선한 분이라서 선비 같다는 생각을 한다. 그분이 남겨준 명언 - 일이 없으면 시간이 많아 좋고, 일이 많으면 경험치(or 돈)이 쌓이니 좋고! 어차피 인생에 내가 컨트롤 가능한 것은 내 마음 뿐이라는데 (열심히 해서 > 잘된다? 그나마 초등학교 때 끝인 듯하고, 운과 온갖 요소가 다 작용하여 인생이 결판 나는 듯) 내 마음도 컨트롤이 안되니 인생은 고통, 고통. 건강하고 선한 정신을 가진 사람이 긍정적인 사고의 산물을 나에게 나누어준 느낌이라 마음이 좋았다. 

 

이상한 일에 자존심 세우지 말고, 이상한 일로 사람들과 대립하지 말고, 모나지 말고, 적당히 중간만 하자. 미움 사지 말자. 깨인 태도를 가지자. 개방적이자. 내가 맞는 경우도 거의 없는 주제에 자존심 높여 세우지 말고 강한 의견 내지 말자. 

 

3. 책도 읽어야 하고, 그놈의 NYLE도 이제는 해야 하는데 아아 난 기력이 없다. 못할 것 같다. 다음 턴을 노려야 하나? 수많은 사람들이 연락을 주어 도대체 이 다음 step이 뭐냐고 물어보는데 선생님들 저도 모르겠어요... 교수님께 연락을 드려야 하는데 연락도 못드렸고, NYLE도 못했다. 일단 내일까지 꺼야 할 너무 싫은 발등 불을 꺼보고 생각하자. 

 

 

4. 서른 중반으로 나아가는 지금 커리어에서 일정한 성숙기(막냉이 지위는 탈출함 & 꽤나 중요한 승진을 앞두고 있거나 그와 유사한 경)에 접어든 친구들과 커리어에 관한 대화를 한다. 이십대 때는 너무나 열려 있는 백지라 마음이 불안했다면, 어떤 무기들을 수집하고 일정한 지위를 구축한 지금은 이걸 바탕으로 어떻게 다음 커리어를 현명하면서 "하고싶은 일"을 할 수 있게 짜는지 찾아가는 과정. 20대 후반 30대 초반 여성이 나오는 드라마의 대부분에서 "사랑"에 관한 고민이 한 꼭지를 크게 차지하는데, 신기하게 주변 친구들 중에 이런 고민 공유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시피하고(사실상 없음) 대부분 "가족" "커리어" 고민만 주구리장창 하고 있으니 뭔가 내가 사회 평균은 아닌가 싶기도. 

 

- "하고 싶은 일"을 못찾았던 사람은 뒤늦게 자아의 곳통을 겪으며 하고 싶은 일을 찾게 된다(이게 엄청 대단한 하고 싶은 일인 경우도 있지만 그냥 밥벌이해도 괜찮은 일도 사람에 따라서는 매우 찾기 힘듦).

- 내 커리어가 이전에 쌓아온 요소들로 한정된다(경우에 따라서는 이전에 배운 것들을 내가 제대로 써먹지 못하기도 함).

- 어떤 식의 인사이트라도  다들 가지고 있다. 일을 좀 해봤으면, 각자 인간관계와 일을 할 때 오는 인사이트를 가지고 있고, 업계 특유의 특징에 관한 통찰력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개똥철학이 난무. 

- 이전에 배운 나의 "쪼"가 남아 있어서 무슨 출신인지 말할 수 있는 그런 나이와 커리어의 지점이기도 하다(사람의 일하는 방식 사고라는 것이 놀랍게 유연하면서 유연하지 못해서, 첫 출발과 단추가 어떠했는지에 따라 몇년을 일해도 사고방식이 바뀌지 않는 부분이 있는 것들도 있어서 가끔 보면 놀람). 

 

커리어도 "운"이다. 어떤 사람은 그냥 운 좋게 생각 없이 들어간 직장 ~ 오 나에게 잘 맞네 하면서 쭉 다니고, 어떤 사람은 기껏 힘들게 들어갔는데 기대한 것과 달라서 고통, 어떤 사람은 꼭 뭔가 해보고 싶어서 갔는데 자기 생각과 달라, 어떤 사람은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몰라서 일단 다 찍어먹어보고 고통을 받은 후 최후의 탈피, 그냥 적당하고 소박하게 이정도 스트레스와 성격에 맞는 사소한 재미로 버팀 등등. 할 수 있는 거라곤 언젠가 확률적으로 운이 터질거라는 믿음, 성실함, 노력, 소소한 재미를 빨리 발굴해내서 고통 상쇄하기, 그리고 그나마 운을 높이기 위하여 성실함과 노력의 방향을 타인과 업계사람들로부터 꾸준히 점검받고 비슷하게 하기. 또 다시 돌아가서 컨트롤 가능한 것은 내 마음뿐. 사소하게 상처받고 생채기가 나지만 크게 다치지 말자, 난 대단한 사람이다 스스로 되뇌이며 스스로를 사랑할수밖에 없는 것 같기도. 

 

이미 모든 부분을 커버해주는 멘토라는 것은 존재하기 힘든 커리어의 어떤 지점에 도달한 것 같다. 사회의 변화도 있겠지만, 점점 그냥 생각 없이 따라할 수 있었던 선배들도 없어지고 롤모델도 사라지고 개별적인 지점에서 모두 다르다는 생각만 든다. 아 저 선배는 결혼을 하고 아이가 있으시지, 아 저 선배는 XX가 장점인데 그건 내가 죽었다 깨나도 못 얻는 거지, 아 저 사람은 YY하고 싶어하지.  좋은 자질을 가진 친구가 정말 새로운 길을 가고자 하여 커리어의 어떤 국면에 막혀 있다면 그것은 그저 귀인과 때를 못 만나서인 것 같기도. 생각없이 따라하면 나오는 커리어가 아니라 스스로 나무를 베어내고 돌을 깔면서 길을 놓아야 하는 상황인데, 이제 점점 나이를 먹으니 나무를 베어내고 돌을 까는 열정도 체력도 다 사라졌어요.. 안온한 생활 유지에도 너무 많은 힘이 드는 나이가 되어 쉬운 것이 없다. 

 

사실 이 대화를 했을 때 정말로 글을 쓰고 싶던 욕구가 충만했는데, 시간이 지나니 대화가 주었던 짜릿한 느낌도 느낌만 남아버리고 무슨 말을 쓰고 싶었는지 까먹어 버렸다. 아 기억력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