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실은 로펌에 적합하지 못한 유리멘탈이다.
멘탈이 좋은 편은 못되고 유리멘탈에 가깝다. 최근에 M언니랑도 이야기한 건데, 우리 둘 다 일희일비하는 스타일이라서 TV에 나와서 말하고 하는 유명인은 못될 것 같다고 했다. 능력이나 이런 걸 떠나서 사람들이 나한테 악플이라도 하나 달면 정신 못 차리고 벌벌 떨게 되는 면이 있다. 예전에 한창 SNS로 실제 악플 달린 DM도 받아보고 (얼마 전에 사진첩 정리하다가 그때 짜증났는지 캡처해놓은 것을 발견했는데, 누군지 몰라도 맨날 급하게 은행가는데 건널목 다 빨간 불로 바뀌고 집에서 나오다가 엄지발가락 문에 찧어라), 악플은 아니지만 시비를 걸거나 뭔가 엄살이다, 또 난리다 이런 식의 댓글도 받아 보았다. 그런 DM이나 댓글을 한창 받을 때 진짜로 멘탈이 좋지 않을 때라서 누구인지 내가 모르는 사람(백퍼 내가 아는 사람인 것 같은데, 본인의 신원을 숨기는 사람)이 나한테 악의를 가지고 접근하는 것만 같아서 내 멘탈을 완전 와장창 무너뜨렸다. 아예 서로 실명을 쓰는 경우에 나한테 시비 거는 댓글을 달면 아는 사람이니까 또 뭐라하는거야 하고 말면 되는데, 티스토리에 와서 익명으로 댓글 달고, 인스타 아이디로 쪽지 보내고… 인스타 전체 공개이다가 바꿨고 티스토리는 댓글 차단도 했었다. 티스토리를 아예 폭파해서 없애 버릴까도 하다가, 한동안 내가 글을 안 쓰니 관심이 끊기기도 했고 그런 댓글을 허용하지 않고 삭제 하는 기능이 있어서 죄다 삭제하고 나니 좀 낫더라.
로펌 일은 확실히 “일희일비하지 않는 멘탈”이 필요하다. 동료 중에 “내 기준으로는” 엄청나게 느긋한데 (사실 그냥 적당히 느긋하시고, 여유 있으시다) 일희일비하지 않고 항상 진중한 사람이 있다. 저년차 때는 느긋함 때문에 혼자 답답해하고 그랬는데, 연차를 먹으면 먹을수록 일희일비하지 않는 멘탈의 그분께서 대단한 것이었다. 나는 사건 하나 터지면 온갖 난리 부르스를 다치고 맨날 초조해하고 불안해하는데, 그분은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대범하고 차분하게 일을 해결하셨다. 똑같이 일을 해결해도 나는 난장판 피우고 주변 사람 힘들게 하는데, 그 분은 과정이 같으면 적어도 남에게 스트레스를 주지 않으셨으니… 그래서 빠릿빠릿함을 많이 요구하는 저년차 시절을 지나고 나니 과연 로펌이 잘 맞는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게 되었다. 게다가 꼼꼼한 편이 아니라 실수도 잦았다. 이렇게 멘탈 개복치로, 오늘 고객 코멘트가 오면 정신이 나갔다가 다음 고객 코멘트가 오면 불만이 폭발하고, 파트너나 후배 어쏘가 조금만 마음에 안 들게 뭔가 보내면 멘탈 다 깨지고… 내가 객관적으로 다른 로펌 친구들보다 일을 많이 했을 것 같지도 않은데 스스로의 감정 폭이 크다 보니 같은 일도 더 버거웠던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예전에 SNS에 썼던 글.
“내가 예전에 선망했고, 또 남들이 선망하는 직업을 가지게 되었는데 그새 나이를 먹어서인지 그냥 지쳐서인지 예전보다 이글이글이 기질이 많이 줄어들어서 한 수 한 수가 버겁고 힘들다. 지금도 소시민이기는 한데, 계속 노력하고 갈고 닦으라는 말을 좀 그만 듣고 싶다고 할까. 일의 흐름을 타거나 흐름 자체를 내 것으로 가져오지 못하고 점점 끌려가고 있었는데 시간 주권을 되찾고 싶다는 생각이 정말 많이 든다.
본투비 사업가보다는 월급쟁이, 1인자보다는 2인자를 선호하는 것 같은데, 동시에 재밌게 일하고 싶고, 이직하거나 크게 drift하려는 노력은 귀찮고, 그렇다고 새로운 걸 열심히 하고 싶은 기분도 잘 안 든다. 일정 수준으로 외국어 스킬을 습득하고 나면 준원어민이 되기 위한 마지막 한 끝의 노력은 잘 하지 않는데, 이런 성향이 업무 태도에도 크게 영향을 미치는지 이제 이 정도면 내 성에 찰만큼은 한 것 같아서 자꾸 노력을 덜하게 된다. 한 순간 아 이정도면 되었지 왜 이랬다가 다음 순간 고객과 선배와 후배에게 미안함과 죄책감을 느꼈다가 오락가락.”
암흑기가 너무 길어서 정확히 어느 시점이었는지 기억은 안 나는데 (멘탈이 애초에 일희일비하는 성격인데, 로펌에서 일희일비하면 멘탈이 좋을 수가 없다. 그래서 매일매일 멘탈이 나빴다) 4년차 초반쯤 되었을 때 내가 20여년 간 쌓았던 비교적 건강한 멘탈을 드디어 다 써버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전에도 뭐 멘탈이 좋은 것은 아니었는데 4년차 초반에는 멘탈이 완전히 소진되어서, 사람들이 다 미웠다. (그래도 동료들은 좋은 사람이었는지 동기들이나 후배들 중엔 미운 사람이 없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내 패악을 다 받아주고 다들 정말 인격자들이었던 것 같다.) 일이 몰리는 느낌을 받으면 제대로 배분을 안해주는 회사에 화가 났고, 자꾸 톤 조정 해달라면서 문장 한 두개 고쳐 달라는 사람을 만나면 아 그거 나한테 고쳐 달라고 할 시간에 그 정도는 본인이 고치면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고, 어린 마음에 갑자기 말도 안되는 일정으로 검토해달라는 고객사도 미웠고, 그거 알겠다고 한 다음 내 일정 확인도 안하고 나한테 패싱하는 파트너도 미웠다. 돈 아낀다고 더 시니어 어쏘가 분명 있는데 나한테 밀어 넣는 선배도 미웠다. 어느 크리스마스 즈음에는 집에 가는데 그냥 뭔가 너무 서러워서 (4년차 혹은 5년차일텐데, 어떤 연차들은 덩어리져 있어서 기억이 잘 안나네) 친한 선배가 장난치고 재밌게 해주는데 (심지어 내 기분 풀어주려고) 체력도 정신도 모자라니 거기에 대응하면 눈물이 터질 것 같아서(막상 별일도 아니었던 것 같은데) 대꾸도 하는 둥 하고 마는 둥 하고 회사 밖으로 뛰쳐나와 정말 어린애처럼 엉엉 울면서 집에 가기도 했다. 놀라운 건 이건 기나긴 흑역사/암흑기의 출발 밖에 안된다.
이렇게 생각하면 나는 로펌이 정말 맞지 않는 사람인데, 어떻게 보면 아직까지 내 욕심을 맞춰 줄 수 있는 조직이 로펌 밖에 없어서 딴 길로 가기가 참 많이 망설여졌다. 그리고 결국 못 나갔다. 그래도 말이 잘 통하는 똑똑한 변호사들과 일하고, 내 마음에 드는 동료들과 서로 으쌰으쌰하고 뒷담화(ㅋㅋㅋ)도 같이 하고 수다도 떨고, 가끔 뿌듯하고, 치열하고, 일 이야기를 해도 서로 눈을 반짝일 수 있고 (??), 사내 정치를 좀 못하더라도 정량화된 것은 아니지만 일을 잘한다는 평가를 들으면 (고생은 하지만) 그래도 살아남을 수 있고. 물론 모든 동료의 모든 구석 구석이 사랑스럽다면 그건 미친 거고 당연히 마음에 드는 부분과 아닌 부분이 혼재하는데, 아주 싫은 부분은 잘 피해왔고 그랬기 때문에 떠나기가 참 겁이 많이 났다. 다른 데 가도 이렇게 마음에 드는 사람들을 만날 수도 있겠지만 새로 시작하는 건 늘 리스크가 있으니까 로펌을 떠나서 변호사가 아닌 사람들과 일할 때의 합을 생각하기가 참 어려웠다. 변호사들 중에 내 기준 부자가 많아서 나 정도 씀씀이는 절대 상위권은 아닌데(아무리 잘 봐줘도 중위권이라고 생각함), 로펌 다니면서 그래도 예전보다 취향이 많이 업그레이드 되어(진짜 로펌 다니기 전의 나라면 상상도 못할 씀씀이) 월급이 줄어드는 것도 참 부담이었다. 기왕 서울에 살거면 많이 받고 싶으니까…
물론 정신 건강이 너무 많이 떨어져서 힘들어 하니 결국 그만두어야겠다고 생각했고 실행에 옮겨보려고 약간의 발버둥을 치다가, 진짜 내가 많이 의지하는 동료들의 조언과 온갖 도움으로 간신히 남아 산소호흡기만 붙인 채 시니어 어쏘 시절을 보냈다. 일을 열심히 하지도 못했던 것 같고, 개인의 성취는 별로 없다시피하고, 로펌에서 생존할지 말지만 가지고 드르렁 대던 시절인 것 같다. 새로운 것을 해보고 싶은 의욕은 없는데 자꾸 회사에서 안해본 것을 시키니 화딱지만 났다. 친한 친구들과 동료들을 정말 많이 괴롭혔다. 그리고 이직하는 데 드는 품보다 LLM 가는 품이 더 적다는 것을 깨닫고 1년이라도 튀어야겠다 생각하고 LLM으로 튀었다. LLM 지원 준비하면서도 사실은 멘탈이 너무 안 좋으니까, 어느 하루는 LLM이고 뭐고 S사 원서를 넣어야 하겠다고 생각하고 불나방처럼 원서 페이지를 켠 다음 “아니 대기업은 왜 이렇게 자수제한이 많아”하며 몇 자 써보고 계약서 쓰기 바빠서 결국 원서 못 넣는 날도 부지기수였다.
아무튼 이렇게 주변 사람 다 힘들게 하고 본인 스스로를 힘들게 하면서도 돌고 돌아 로펌에 남아보기로, 그래도 1-2년은 열심히 해보고 어떻게 될지 생각해보기로 결정했다. 아마 로펌에 남을 생각이 없었다면 (오기 직전만해도 와서 이렇게 즐길 줄 몰랐고 해외 생활의 로망도 없었기 때문에) 아예 LLM을 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멘탈 개복치이기는 하지만, 인생 전반적으로 보았을 때 그래도 너무 평온한 것을 좋아하지 않는 성향이다. 도전이 있고 그걸 성취하면 (과정은 너무 괴롭지만) 대체로 좋아하고 뿌듯하다. 소울에 나오던 주인공처럼 허탈하게 느끼기보다는 그 성취를 다시 수십년간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면서 즐거워하는 그런 스타일이다. 로펌에 있으면 조금이라도 소소한 성취를 느낄 수가 있을테니 (착각인 것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노하우가 생긴 느낌, 뭔가 배운 느낌. 그렇게 손에 잡힌 모래 같은 모호한 느낌을 좋아하는 것 같다. 점점 줄어들고는 있지만 예전에는 어려운 프로젝트 끝나면 그렇게 뿌듯하더라.. 요샌 짜증만 남), 고통에 비례하여 내 정신건강에 플러스인 요소가 있다고는 생각했다 (치매 안 걸리지 않을까?). 게다가 하필 “팀”으로 하는 일을 하고 있는데, 나는 무엇보다 관계성에서 오는 요소들이 중요해서 여러 해 일하면서 서로 팀이 맞추어 놓은 이 합(match)에 좀 중독된 것 같기도 하다. 이제 사람들의 성격도 대강 아니까 지겹고 새롭지 않은 면도 있는데, 또 편하고 설명을 많이 안하더라도 서로 알아듣는 상태인 것이 기쁘기도 하고.
그리고 멘탈 개복치의 다른 면인데, 겁이 많아서 어떤 걸 하나 정하면 잘 바꾸는 것을 못한다. 잘못 정한 것 같은 나의 대학원처럼… 겁도 많은데 더 나아가서 아무튼 뭔가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썰어야지하는 심정이 있기도 하다. 이런 겁많고 우유부단한 성격 때문에 계속해서 (다른 로펌이나 직역으로 이직하는 것과 비교하였을 때?) 도태되고 멈춰 있는 느낌을 받으면서도 동시에 계속 고여 있고 싶은 그런 모순된 욕망들이 모여서 결국 로펌에 계속 다니게 된 것 같다. 난 새로운 데 도전하는 것을 굉장히 무서워하는 성격이라서, 내 생각엔 아마 내가 로펌이 아니라 사내변으로 시작했으면 무조건 사내변만 계속 했을 것이고 공공조직에 갔으면 계속 공공조직만 찾아봤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늘 직역을 틀어서 이직하는 파워 이직러들 존경합니다.
2.더 규모 있는 로펌, 더 월급 많은 로펌으로 이직하기엔 겁도 많고 어렸다.
저년차 때 더 규모 있는 로펌에 대한 동경과 두려움이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매우 많았다. 왠지 사건도 나보다 더 크고 좋은 것을 할 것 같고(어느 정도 맞는 말이기도 하고), 시스템도 탄탄할 것 같고, 파트너들도 더 열심히 꼼꼼하게 보고 경험도 많을 것 같았다. 특히 내가 주로 하는 deal 분야는 회사 규모와 deal 규모가 상응하는 면이 있어서, 내가 큰 딜 1개 경험할 동안 동기들은 3-4개씩 찍는 것 같았다(물론 이제는 deal의 규모보다는 내가 거기서 무슨 역할을 했고 어떤 퀄리티를 경험했는지가 중요하다는 것을 안다). 다른 로펌 다니는 친구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back office도 탄탄하고, 다른 팀과의 협업도 잘 되었다. 이런 쟁점은 이 팀 도움을 받고 저런 쟁점은 저 팀 도움을 받고…내가 회사 처음 다닐 때만 해도 우리 회사에 분화 안된 팀들이 다 있었고, 분화 안된 우리 팀 내에서 결국 다른 팀에서 할 법한 쟁점들을 모두 검토하게 되었다. 이런 지점들 때문에 얇고 넓게 배워서 좋다고 생각하면서도, 결국 계속 “대규모” 조직을 경험해보고 싶은 욕망이 계속 있었다.
그렇지만 더 규모 있고 월급 많이 주는 좋은 로펌으로 이직 시도는 안한 면이 있고, 못한 면도 있다. 솔직히 못한 것이 맞는 것이 아무도 나에게 이직 제안을 해주지 않았다 (“사람들이 인재를 못 알아보네”하고 정신승리를 해본다). “안한” 면도 있는 게 나도 그때 당시에는 적극적으로 이직 생각을 해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좋게 말하면 (상사들이 좋아하거나 미련하다고 부려먹을 수 있게) 회사에 충성스러운 거고, 나쁘게 말하면 시장에서 볼 때 그다지 매력적인 candidate는 아니었다는 이야기겠지(누구를 뽑는 자리가 나왔을 때, 그 회사의 “그 친구”하고 딱 떠오르지 않았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어떤 면으로는 내가 다소 어렸다. 첫 직장이라 애정을 많이 줬고 (지금도 솔직히 애정이 많고), 동료들을 너무 좋아했다. 누구는 나보고 멍청하다고 할 수도 있다. “직장을 직장으로 다녀라”고 친한 선배가 조언해주었는데 나한테는 그게 너무 어려웠다. 지나고 보니 참 어렸는데, 누군가를 배신하는 느낌도 들고 마치 무협지(?)에 나오는 문파(?)의 구성원(?)처럼 스스로를 좀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면서 입으로는 남들 가는 거 부러워하기도 했지만..내 마음 한구석에는 다른 로펌을 가지 않을 이유를 많이 찾았던 것 같고 솔직히 그건 지금도 그렇다.
저년차 때는 업무를 배울 때 더 파트너랑 attach 되어서 지도 받곤 했는데, 그런 지도를 놓치기 힘든 생각도 있었다. 어딜 가면 누가 나한테 이걸 이렇게, 저렇게 세세히 가르쳐 줄까 싶었고 저년차 때는 그래서 잘 배운 것도 맞다고 생각한다. 역시 예전에 SNS에 쓴 글. 5년차였던 것 같다.
“오늘의 잡생각.
1. 내가 속한 곳은 나와 다르다.
2. 그렇지만 좋은 곳에 속하면 좋은 영향을 받을 수 있다.
3. 1.과 2.를 구별하지 못하면 아무리 좋은 곳에 속해봤자 내가 좋아지지는 않는다.
4. (현실적 한계로 인하여 가만히 있는다고 해서) 경험의 수를 늘릴 수 없다면, 내가 우연히 경험하는 한 가지 한 가지 일에서 모든 것을 뽑아 먹을 수 있어야 한다. 복기가 중요하고 지속적인 리마인드가 중요하다.
5. 그렇지만 동시에 복기와 리마인드를 통해 현실적인 한계를 뛰어넘기는 어렵기도 하다.
6. 환경을 변화시키면 현실적인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지점들이 많이 생기지만(다른 경험을 하니까) 그 경험도 결국 오래 안간다. 결국 모든 것은 일상화되고... 동일한 일상도 색다른 시각으로 보기를 게을리하면 계속 환경을 바꾸려는 충동만 든다(는 나).”
예전에 로펌들이 월급을 공개하지 않을 때, 그리고 실제로 월급을 인상하기 전에는 월급 더 받으려고 이직하려는 노력이 좀 의미가 적어 보이기도 했다. 세후로 따지면 (큰 금액이긴 하지만) 일정액 차이인데, 그 일정액을 받으려고 내 몸과 정신을 더 갈아 넣으면 난 그대로 폭파하거나 산화해버릴 것 같았다. 지금은 니트로글리센이 안정화되어 있는 상태인데 조금만 충격을 더 주면 완전 후폭풍이 장난 아닐 거라 생각했다.
저년차 때 이직을 안하니까 점점 몸이 무거워져서 이직하기가 어려워졌다. 내가 여기서 쌓은 관계, 내 노력을 모두 0으로 돌리고 새로 시작할 자신이 없었고 지난 내 노력들이 내가 생각해도 대단한 면도 있어서 다른 데 가서 그만큼 할 자신도 없었다.
그래도 과거를 돌이켜 봤을 때 과거의 “이직하지 않기로” 한 부작위의 선택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그때 내 처지에 합리적인 선택이었고, 아마 다른 로펌으로 가면 스트레스와 인정 받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자괴감으로 멘탈이 정말 갈갈이 갈려 폭발해버렸을 것이다. 정말 합리적인 생각이냐고 하면 합리적이라는 말은 못할 텐데, 인생 합리적으로만 사는 것 아니니까 마음이 가장 편한 행위를 했다고는 생각한다. 다른 직역으로 이직을 하지 않은 것에 대한 아쉬움은 아직도 가끔 문득문득 들지만 다른 로펌으로 과거에 이직하지 않았다는 아쉬움은 크게 들지 않는 것 같다. 가려면 조금 일찍 갔어야지 싶으면서도, 그 나이의 나는 이직했으면 오히려 참 마음이 불편했다는 것을 안다. 차라리 지금 다른 로펌으로 가라면 오히려 심적으로 갈 수는 있겠는데, 반대로 지금은 마음이 아니라 몸이 불편하고 내 스스로 room을 만들려면 다시 1년차 때처럼 인정투쟁을 하는데 1년차랑 다르게 여러 척도가 주어질 것이라 쉽지 않을 것 같아서 갈 수가 없다.
사람마다 어떤 선택지가 주어졌을 때 선택하는 방향이 다르다. 아쉬움이 좀 있더라도 편안한 길을 택하는 경우, 혹은 아쉬움을 돌이켜 보기 싫어서 다 불질러버릴 각오하고 선택하는 경우. 나는 선택의 길에서 아쉬움이 남으면 자존감이 많이 떨어진다고 생각해서 후자의 선택을 주로 하고 살았는데, 후자를 하더라도 내가 생각하고 들은 것, 상상한 것과 다른 경우가 너무 많다 보니 후자의 선택을 하는 것이 맞냐는 의문도 종종 든다. 그런데 “다른 로펌”으로 가는 이 문제에서는 아쉬움이 좀 있더라도 편안한 길을 택하게 되었는데, 어린 마음에 패기로 내가 해낼 수 있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 패기..패기여도 너무 패기지… 이제는 역량도 의지도 부족한 나를 받아들이고 과거의 선택이 치기 어렸다는 생각을 하지만 그때 또 이직했어도 마음 불편하게 또 괴로워했을 것이라고 생각은 한다.
이직하지 않았던 이유를 정당화하려니 참으로 혓바닥이 길어지는구나… 돌아가기 전에 어느 정도 생각을 정리할 주제를 6개 정도 생각해뒀었는데, 하나 하나의 주제에 대해서 역시 생각이 잘 정리되어 있지 않으니 그나마 생각이 잘 정리되어 있다고 생각한 앞쪽의 경우에도 말로 표현하려니 엉키고 나도 논리적이지 않다거나 마음에서 해소가 완벽히 되지 않는 접합부분이 있다는 게 느껴진다. 그래도 어쩌겠어, 내가 낸걸.
3. 로펌을 계속 다닌 지금 이 순간, 몸이 너무 무거워져버렸다.
이제 머리로도 이직하지 않은 것이 내가 원하는 것과 다소 일치하지 않는 면이 있고 심적인 부담감도 줄어들었다. 그런데 이제는 몸이 따라주질 않아서 이직을 못하고 있다. 게다가 매몰비용인듯 매몰비용 아닌듯 매몰비용인 투입시간과 투자한 세월이 있어서 이직은 한동안 요원할 것 같다.
첫째로, 투자한 것을 수확할 시기일 수 있으니. 내가 이제까지 공을 쏟고 부어서 이제 곧 수확의 철을 맞이할 수 있다 (물론 수확했는데 쭉정이일 가능성도 있기는 함). 게으르니 딴 곳으로 이직해서 다시 비용 지출하는 선택은 나에게 너무 가혹하다. 설령 매몰비용이라고 하더라도 이제까지 투자한 걸 버리고 가는 경제적 인간이 되어 본 적조차 없다.
둘째로, 안주하는 게 더 편하다. 앞으로 인생을 살면서 중년의 위기가 올텐데(?!) 어떤 위기와 나 자신의 게으름과 심리적 불안감을 겪을지 모르는데 그걸 회수하기에는 지금 이 곳이 가장 좋다. 이제까지 투자한 것과 세월을 기억해주는 사람이 있고, 설령 기억못하면 내가 우겨서 기억하게 만들면 된다. 여기 계속 있으면 암묵적인 rule도 알고 있고 눈치 볼 것도 없으니 편하다. 여전히 두려워서인 마음도 조금은 있다.온실에서 자랐는데 시장의 평가에 아무런 방어막 없이 오롯이 내던져졌다가 크게 다치진 않을까?
셋째로, 내가 무엇인가 내가 원하는 무엇인가를 주도적으로 해내야 한다면, 가장 적은 비용으로 가장 큰 결과를 만들 수 있는 곳이 바로 이 곳이기도 하다. 기왕 1-2년 로펌에 다니면서 해보기로 한 이상, 일단은 이직을 하지 말고 내가 편한 “판”에서, 남들에게 비용도 지원해달라고 해보고 이것도 밀어달라고 해보고 이것저것 요구도 해보고 뻔뻔하게 다녀 보면 좋지 않을지, 그런 생각을 스스로 해본다. 분명 가자마자 한달만에 때려 치우고 싶어질텐데, 다소 여유 있을 때 지금 쓴 이글이 내 마음을 조금 더 편하게 해줄 수 있는 길이면 좋겠다. 인생에 정답도 없고, 내 마음 편한 게 최고다. 마음 불편하고 괴로운 게 제일 별로.
'WORK > 나의 변호사 생활기: jot down'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돌아가는 길에 (4) - 끝나지 않는 고민 (0) | 2023.08.25 |
---|---|
돌아가는 길에 (3) - 나만의 잭팟이 터지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0) | 2023.08.21 |
돌아가는 길에 (2) - 좋은 동료가 될 수 있을까? (1) | 2023.08.13 |
돌아가는 길에 (0) - 사람마다 자신의 화두가 있다. (0) | 2023.07.28 |
전자동 연필깎이에 꽂혀서 (0) | 2023.07.06 |
오늘의 일기: 넷플릭스 4부작, 오바마의 일(work) (1) | 2023.06.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