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난 어떤 동료가 되고 싶을까.
나는 내가 다니는 회사에 대한 애정이 큰 편인듯 하다(나도 몰랐는데 줄줄 새어 나오는지 남들이 나랑 이야기해보면 다들 알더라). 왜 애정하냐고 물어보면… 처음엔 애정할 이유가 명확했던 것 같은데, 몇 년이 지난 지금은 오히려 잘 모르겠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계속 좋아하는 것은 맞는데, 나를 로펌으로 이끈 많은 이들은 다른 길을 찾았거나 나와의 관계가 변했다. 그럼에도 아직도 애증을 느끼는 것을 보면 선동이 쉬운 사람인가보다(?).다행히 사람 운은 트인 편인지, 내 애정에 보답을 해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제대로 애정을 쏟아서 반대로 선후배 동료들에게 진짜 많은 애정을 돌려 받았다고 생각한다. 내가 1을 줘도 10을 돌려주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많이 보답 받고 많이 애정을 받았다. 그래서 더 못 그만 둔 것 같기도 하고…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겠지만, 로펌에 다니는 변호사도 마찬가지로 스스로의 모습을 여러 관계에서 설정해야 할 것이다. 대충 생각해봐도 동료(선후배 포함)와의 관계, 고객과의 관계, 가족/친구 등 사적인 인간관계가 있을 텐데, 운이 좋아 감사하게도 가족에게 아주 큰 일은 없었고 친구들은 늘 나를 서포트해주는 좋은 사람들이어서 어쏘 생활 내내 가족/친구 관계를 고민한 적은 거의 없는 것 같다. 로펌에 입사할 때만해도 조금 다니다 때려치워 버려야지 하는 생각이 있어서 (사실 지금도 없다면 거짓말이다. 실행하지도 못할 거면서 매일 지방 내려가서 위스키바 차리는 망상을 하며 즐거워하다) 아주 구체적인 의미의 고객 관계는 고민하지도 않았다. 막연하게 나중에 나에게 일 줄 고객은 없을 것 같은데, 정도의 불안감일 뿐 구체적인 관계를 고민하지는 못했다.유학 나올 때까지 관계를 고민할 고객도 많지 않았다. 물론 고객이랑 접점이 없다는 것은 절대 아닌데, 항상 파트너 변호사님들을 통해 관계 맺음을 해왔으니 내가 먼저 나서서 관계성을 고민하지 않았고 주어진 가이드를 많이 따르게 되었다.
내가 언제나 늘 가장 고민한 것은 “동료”와의 관계였다. 이건 내 화두(= 일을 어떻게 잘할지)와도 연결되어 있다. 일을 잘하고 싶은데 팀으로 일해야 하니까, 주변 사람들에게 꽤나 가혹했다. 후배들 방에다 불러다 놓고 까기도 술 먹고 밥 먹을 때도 주로 일 이야기만 했다. 파트너들한테 짜증도 엄청 많이 내고, 힘들면 힘들다 짜증나게 하면 짜증난다는 티란 티는 전부 냈다. 내 진상 다 받아준 어쏘들이랑 짜증 다 받아준 파트너들이 보살이네…. 감정을 다 빼고 일하는 선배한테 주로 많이 배워서 남의 감정을 처리할 일이 정작 없었는데, 나는 좀 그러질 못해서 매번 짜증을 많이 냈던 것 같다. 내가 제일 닮고 싶지 않던 선배를 닮아가는 내 모습을 볼 때 마다 이 일 그만해야 하나 하는 생각을 많이 했다. 자기 실수에는 너그럽고 남에게는 가혹한 것 같아서 괴로울 때도 있었다.
이번 기회에 여러 부유하는 생각들을 가만히 고찰해보다가, 정작 나는 로펌 다니는 기간 내내 내가 다른 사람에게 어떤 동료가 될 것인지, 혹은 되고 싶은지 막연하게만 생각해왔고 진지하게 고민해본 적은 별로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에게만 가혹했고 정작 나에게는 관대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주변 동료들에게 미안한 생각도 살풋 들었다. 그래서 어떤 동료가 되고 싶은지 생각을 해보았다. 무엇을 물어보아도 늘 웃으면서 생글생글 대답해주시는 L변호사님, 남의 실수에는 많이 관대하고 늘 내가 사고 쳤을 때 가서 상담할 수 있는 K변호사님, 어떤 어려운 질문을 가지고 상의를 드려도 이런 논문을 봐라, 저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 하고 조언을 해주시는 S변호사님, 자기가 조금 손해보더라도 늘 주변 사람을 챙겨주는 Y변호사님, 싫은 내색 싫은 소리 안하고 늘 참아내고 우직하게 있으면서 본인을 증명해내 C변호사님, 최고의 분위기 메이커 J변호사님 등등 많은 동료들의 모습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이미 좋은 동료들이 많았고, 이런 변호사라면 좋은 동료의 표본 같다는 사람도 많았다. 예전이었으면 이런 저런 변호사님들의 좋은 모습만 모아낸 ideal한 모습(플라톤의 이데아 같은 것일까)을 목표로 삼았을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한계를 아는 지금은 그런 모습을 표본으로 삼지는 않는다. 사람 생긴대로 살아야지 나에게 맞지 않는 이상향을 목표로 했다가는 괴롭기만 하다. 나다운 모습 중에서 가장 나은 모습, 그리고 힘들고 피곤해도 지속 가능한 그런 모습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해서 내 안에서 나은 모습이 무엇일까를 생각해본다. 불평 불만이 많고 궁시렁대는 내 모습을 없앨 순 없으니, 그래도 “강강약약”이 되는 동료(나보다 더 취약한 사람에게 가혹하지 않은 사람)가 되겠다고 생각했다. 예전에는 어려운 프로젝트가 생겼을 때 사람들이 나를 찾게 해주는 사람이 되겠다고 생각했는데, 나이를 먹을수록 내 총명함과 의지력의 한계를 느끼고 내가 그렇게는 못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많이 든다.
2. 좋은 후배가 되기에는 이미 그른 것 같기도 하다.
꽤나 오랜 시간을 어쏘로 지냈는데, 나는 파트너들의 관점에서 그다지 좋은 어쏘는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일단 고분고분하지가 않았고, 어떤 일을 시키면 그대로 한 번에 들어먹는 법이 없었다. 당연히 파트너 입장에서 좋은 어쏘는 일할 때 부담 없고 빠릿빠릿 시키는 일 잘하는 어쏘일텐데, 나는 일시키면 항상 궁시렁대니 시키는 사람 입장에서는 당연히 부담이 갈 법하다. 파트너 입장에서는 “내 시간을 줄여주고, 나의 감정 소모를 덜 시키는 어쏘”가 좋은 어쏘인데, 어쨌든 나를 쓰면 어쨌든 계속해서 부딪혀야 하고 적잖은 감정 소모가 있으니, 나랑 일하면 스트레스 받는 분들도 꽤 있었을 듯. 이미 꽤 이런 이미지가 굳어졌으니…좋은 후배되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LLM 할 때도 다른 로펌 변호사들하고 이야기해보면 확실히 내가 예의도 부족하고 천방지축 얼렁뚱땅 다닌 면이 있다.
그래도 한 가지 다행인 것은 나랑 일한 파트너들 중 많은 수가 굉장히 인격자였다는 점. 여러 해 시간을 보내면서, 내 진심(?)을 알아주고 내 속성을 이해해준 많은 선배들이 있어서 무난하게 나름 예쁨 받으면서 회사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누울 자리 보고 발 뻗은 것도 있는 것 같기도 하고… 파트너 변호사님들 포함 선배들에게 매번 많이 의존하고, 봐 달라고 하고, 도와 달라고 하고, 더더욱 높고 가혹한 기준을 들이대며 해달라고 했으니 사실 참 많이 손이 가는 후배이다. 일을 할 때 또 한 측면에서 고민했던 것은, 훌륭한 선배들에게 늘 더 부담을 지워드리고 의존한다는 점. 훌륭할수록 기대가 높으니 사소한 것에도 실망하고 더 많이 요구하게 되어 매번 의존적이고 스스로 “강강약약”이 안되는 느낌이라 괴로울 때도 많았다.
돌아가면 내가 나쁜 습관을 버리고 좋은 어쏘/후배로 환골탈태 할 수 있을까? 잘 모르겠다. 여전히 과거 습관이 나올 것만 같고… 정신을 바짝 차리겠다고 다짐은 해보지만, 난 나쁜 습관을 정말 못 고치는 사람이라 선배들에게 살갑게, 혹은 사근사근, 혹은 고분고분 대하지 못할 것만 같다. 그래도 이젠 좀 그럴 때가 된 것도 같은데, 보나마나 지치고 힘들면 예전의 나쁜 습관이 슬그머니 스르렁 스르렁 새어나오겠지. 아주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은 어려우니, 조금은 다른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보자고 다짐해본다.
3. 좋은 선배는 될 수 있을까
좋은 어쏘/후배가 되는 것보다 좋은 선배가 되는 것은 더욱 어려운 것 같다. “좋다”에 굉장히 많은 것이 함축되어 있기는 하지만, 내 생각에 좋은 선배가 되려면 결국 후배가 하지 못하는 일을 할 수 있어야 하고, 더 나아가서 후배에게 괜찮은 비전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하는 듯하다.
후배가 준 결과물이 엄청 훌륭해서 오탈자만 고친다면 그것도 그것 나름대로 의미가 있을 수 있지만, 매번 모든 일에 아무런 insight를 주지 못하고 경험을 바탕으로 guide를 주지 못한다면 내 스스로 로펌에 계속 남아 있을 이유가 있을까? 알량한 자존심이지만, 아무런 value add up을 못한다면 직장을 바꾸겠다는 생각이 있다. 이제까진 그래도 내가 남아서 회사에 생기는 이득 > 회사가 나에게 쓰는 비용이라고 당당하게 생각해 왔음. 예전에 쇼츠를 보다가 같은 생수 1병이 편의점에서는 1달러, 좋은 레스토랑에서는 3달러, 공항에서는 6달러가 된다고, 달라진 것은 “장소” 밖에 없으니 너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면 장소를 바꿀 필요가 있다는 내용의 영상을 본 적이 있다. 내가 아무런 기여를 하지 못한다면 다른 곳에 가는 것이 서로에게 윈윈 아닐지.
로펌에 꽤 다녔다고 생각하지만 아직 경험은 일천하고, 솔직히 동료들 중에 가장 똑똑하거나 통찰력이 좋아서 어떤 이슈를 보면 탁하고 떠오르는 것이 있지도 않다(간혹 비슷한 연차에 그런 모습을 보여주는 변호사들이 있는데, 그런 경우에는 참 존경하고 대단하다는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 같다). 사회생활 스킬이 만렙이라서 고객과의 관계를 원만하게 풀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링컨 차를 타는 변호사처럼 창의적이고 과감한 해결책을 주지도 못한다. 내가 직접 자료를 보고 초안을 검토하던 중간 연차 어쏘 시절에는 내가 모든 것을 다 챙기니 내가 많이 생각하고 시간을 쓸 수도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다른 영역의 능력이 필요한 것 같아서 조금 겁이 나기도 한다.선배가 되어서 여러 가지 사건을 동시에 manage할 때는 결국 후배의 결과물을 보고 적절한 insight를 주고 또 뭔가 value add up을 할 수 있는 그런 요소를 추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건 어쏘일 때와 또 다른 영역이라고 생각하고, 어쏘로서의 자질이 훌륭하다고 해서 자연스럽게 갖추어지는 자질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해보지 않은 영역이고, 파트너마다 어쏘의 결과물에 value add up 하는 방식도 다르고 정해진 루트가 있는 것도 아니기에 답답함도 있고, 그래도 그간 괜찮게 쌓아왔다고 생각한 평판을 한 방에 날릴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 겁이 나기도 한다.
나도 내 앞이 안보이는데 후배들에게 비전을 줄 수 있냐만은… role이 바뀌는 이상 누군가에게 비전을 줄 수 있도록 스스로를 계발하고 의식적으로 새로운 먹거리를 찾으려는 노력을 해야겠다고 생각한다. 물론 어떤 노력을 해야할지는 스스로 아무런 감이 잡히지 않아서 굉장히 두루뭉수리하다. 로펌에 다니면서 답답했던 부분 중 하나는 선명한 비전이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물론 내가 원하는 정도의 선명한 비전이 보이는 진로가 무엇이겠냐만은… 롤모델 부재의 시대에 살고 있는 느낌이었다. 저 사람은 나랑 비슷하니 나도 저렇게 해볼까라거나, 이렇게 하면 그래도 어느 정도 성공할 수 있다는 기분이 드는 루트가 하나도 없었다. 내가 생각이 많은 것도 있다. 친한 선배들은 생각을 너무 많이 하지 말고 닥치면 하면 된다, 이제까지 잘해왔으니 할 수 있다고 했는데, 내 마음 속에 항상 존재하는 불안감이 도대체 비전이 있기는 한가라는 질문으로 계속 끊임없이 돌아오게 했다. 물론 운과 때가 맞아야 하니 아무도 나의 성공을 담보할 수 없다는 것은 알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안개 속을 계속해서 걷는 느낌이라 갑갑함이 있었다. 그래도 그 와중에 어떤 새로운 것을 개척해냈거나, 이런 저런 노력의 tip들을 공유해주는 변호사님들로부터는 참 많이 배웠다.
LLM 기간에 생각한 것 중 하나는, 비전이 긍정적이고 확신의 찬 태도와 지지로 생기기도 한다는 점. 처음에 imposter syndrome을 걱정한 것인지 학교에서 끊임없이 넌 훌륭하고, 능력이 있기 때문에 뽑힌 것이라는 말을 계속해주었다. 처음엔 당연한 말을 되게 계속 해주네 했는데, 어느 새 세뇌가 된 것인지 반년쯤 지나자 그런 말을 들을 때 설명하기 어렵지만 사람들 사이에 뭔가 에너지가 생기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타고나길 부정적 인간은 California식 Sunny & Happy day가 아닌 Boston식 약간의 긍정도 과한 느낌이었지만, 마음이 평안할 때 그런 긍정적인 멘트들을 들으면서 어떻게 칭찬이 고래를 춤추게 하는지 진짜 “진심으로” 느낄 수 있었다. 긍정적이고 확신의 찬 태도로 지쳐버린 사람들에게 약간의 긍정의 기운을 전달해줄 수 있기만 해도 좋을 것 같다. 강제로 연습해야겠네.
4. 좋은 동료는 될 수 있을까.
어떤 질문을 해도 늘 적극적이고 한결같은 L 변호사님과, 한참 후배가 부탁하는 일이라도 늘 발벗고 재빠르게 처리해주는 H 변호사님을 보면서 항상 했던 생각이 있다. 비슷한 연차의 변호사님들 중 가장 협업하고 싶은 사람은, 결국 업무 능력이 있으면서, 태도는 Yes man, 가격이 낮은 일이라고 허투루 하지 않고 나의 입장을 헤아려주는 사람이었다. 이렇게 쓰고 보니 거의 무적 변호사네.
훌륭한 선배들이 몸소 보여줬기에, 좋은 동료가 어때야하는지에 관한 기준도 굉장히 높아진 듯하다. 물론 살다보면 사람이 계속 그렇게 못사니까 스스로 관대하게 이것은 괜찮아, 저것도 괜찮아 하면서 자체 보정 들어가겠지뭐…. 사람이 참 간사한 건데, 똑같이 짜치는 일도 열심히 하고 늘 잘해주었던 비슷한 연차, 혹은 어쏘 시절을 동고동락하면서 굴렀던 선배님들이 부탁하면 흔쾌히 하게 되는 면이 있다. 이런 속성을 생각하면 좋은 후배되기보다는 쉬워 보이는데… 과연 궁시렁대지 않고 Yes Man이 될 수 있을지. 닥쳐봐야 알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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