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갈 때가 되니 드는 끝끝내 미루어 두었던 잡생각들을 드디어 “해야”하게 되었다. 그동안 매일매일의 삶에 영향이 없다 보니까 더더욱 생각을 안하고 있었기도 하고, 지금 생각을 해보아도 답도 없는데 일단 즐기고 생각하자는 마음으로 일부러 생각을 유예하기도 했다. 어떤 생각이나 불안감은 머릿속으로 유예하겠다고 수없이 생각을 반복하더라도 유예가 안되는 면이 분명히 있다. 그렇지만 시간차/거리차에 몹시도 취약한 나란 사람은 일/회사/하루하루 쪼이는 스케줄과 멀어지니 아주 너무나도 자연스럽게/그리고 강제로 여러 생각들과도 멀어져 버렸다.
짧다면 짧은 6년의 기간 동안 사람에 따라서는 중형 혹은 대형이 왔다갔다하는 로펌(아니 이러면 너무 특정되나?)에서 구르면서 경험적으로 배운 것인데, 오히려 좋은 인사이트는 끊임없는 생각(혹은 지나친 집착)과 멀어졌을 때 생기기도 한다. 그동안 산발적으로 떠오르면서 공중에 부유하던 생각들이 잠시 생각을 멈추고 나면 서서히 가라앉아 엑기스만 남을 때도 있다. 살다 보면 싫고 몸서리치는 감정들도 좀 줄어들어서 감정을 좀 빼고 보았을 때 보다 덜 비뚤어진 마음으로 사안을 바라보게 되기도 한다. 그래도 “일”과 한동안 떨어져 있었으니 그래도 괜찮은 생각들이 걸러져서 남지 않았을까, 하는 기대를 해본다.
물론 여기에 쏟아낼 두서 없는 이런 저런 생각은 당연히 복귀해서 일을 시작하면 내가 하지 않으려고 해도 자연스럽게 하게 될, 그런 종류의 생각들이다. 그렇지만 지금 이 순간이 가지는 장점을 놓치지 않기로 한다. 지금 이 순간은 앞으로 로펌을 그만두지 않는다면 몇년간 오지 않을 "긍정적"인 나를 마주한 순간이다. (긍정적인 상태가 고작 이정도 밖에 안되는게 내가 원래 얼마나 부정적인 인간인지를 보여주기는 하지만...) 아직 실컷 놀고 쉰 기운이 덜 빠져서 정신이 멀쩡하고 별로 꼬이거나 부정적인 부분도 없다. 이게 바로 내가 알던 나인데-라고 스스로에게 이야기하면서 또 동시에, 로펌을 다닌지 이렇게 오래되었는데 여전히 이 상시적 이상함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로펌의 다니지 않던 나를 “정상”혹은 “표준”으로 삼아서 생각하고 있다. 어쨌든 지금의 나는 아직 로펌과 일에 오염이 덜 되어 있어서 내가 생각하는 표준에 가깝다. 정신적/신체적으로 체력이 있어서 세상에 그 누가 나에게 해악스러운 이야기를 하더라도 내 심지가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 (물론 당연히 동공지진하고 멘탈은 깨진다.) 쉽게 말하자면 정신이 비교적 건강한 상태이다. 사람이 궁지에 몰려서 다른 사람/어떤 계기를 너무 싫어하거나 이유없이 부정적이 되어 남을 공격하거나 괴롭히지 않는 순간.
이렇게 괴로움이 없는 평온한 때는 (배설의 필요가 없으니까, 충동적이지 않기 때문에) 아무런 기록을 하지 않게 되지만, 조금이라도 많이 기록해 두려고 한다. 사람의 생각은 시간이 지나면서, 그래서 처한 입장이 달라지면서 바뀌는 것이니 여기다 기록해 두고 때가 되어 단단히 냉동되었을 때 꺼내어 보면 또 새로울 듯. 지금의 생각은 어느 정도 일의 괴로움과 멀어진 다음 한 생각이니, 어떤 의미에서는 냉정하고 객관적이고 다른 의미에서는 중립적이지는 못할 것이다(나라는 사람의 성격이 30년 동안 형성된 바에 의하면 나는 왠지 뒤를 돌아볼 때 고통을 늘 적게 계산하므로).
이 글은 누구를 설득하고자 하는 글도 아니고, 많은 사람이 공감해주기를 바라는 글도 아니다. 예전 같았으면 아주 많은 공감을 바랐을 것이다. K-꼰대의 생각… 제발 공감해주세요. 그런데 최근에는 사실은 같은 부류가 너무 적어지는 거 같아서, 나이 먹었는데 계속 내 이야기가 유효하기를 바라는 것도 너무 큰 욕심이라는 생각을 했다. 마지막 남은 바퀴벌레 같이, 나와 같이 호흡하는 인류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런 저런 사소한 욕심을 제하고 나면, 그저 내 안의 내면에서 고여 있고 엉켜 있는 수많은 생각을 “토해내는” 것이 주목적이다. 그냥 쏟아져 나오는 욕망이 싫은 분은 나를 멀리하면 될 것이고 이 글을 읽지 않으면 될 일이다. 내 욕망 자체가 뒤틀린 면이 있으니, 어떤 이에게는 꼰대 같은 생각으로 느껴질 것이고, 어떤 이에게는 지나치게 나이브하거나 이상적인 생각으로 느껴질 것이다. 2년 후의 내가 보면 그냥 쪽팔릴 것이 자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글을 쏟아내는 이유는 쏟아내는 행위가 없을 때 생각을 멈추고 망가지는 경우가 부지기수라서. 끊임없이 토해내야 완성되는 생각, 조금씩 다듬으며 완성되는 생각, 성긴 생각들을 마구 풀어본다. “남남”이라는 카카오 웹툰이 있다. 19금 성인 웹툰인데, 미혼모인 엄마와 딸의 관계를 아주 재밌게 그려낸 작품이고 사람에 대해 생각할 거리도 꽤 많이 준다. 아무튼 여기 여주인공 “진희”는 생각 나는 것을 그대로 말하는 스타일이라 마음의 공감이 많이 갔다. 작가 가라사대 진희는 “고민이 생겼을 때 자신은 생각하면서 정리를 해야 하는 타입인데, 그 정리를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면서 하는 타입이라는 것.” 이 한 줄의 이야기에 설명이 안되던 과거에 “말하고 싶어요 나”가 설명이 되는 느낌이 들었다. 뭔가 나에게 알맞은 말을 찾은 기분이랄까. 이 웹툰의 대사에 힘입어 나도 그냥 정리 안된 생각들 우당탕탕 적어 내려 가련다.
0. 사람마다 자신의 화두가 있다.
이 글은 직장을 직장으로만 다니지 못하는 사람의 자기 고백이다. 수년간의 노력 끝에 전보다는 직장을 “직장”으로서만 대하고 있고 약간의 거리두기에 성공하고 있고, “일”에도 거리를 좀 두고 있다. 그러나 다르게 말하면, 이렇게 거리두기에 성공했다고 애써서 말하는 것 자체가 거리 두기에 그다지 성공해지 못하였다는 이야기다. 거리두기가 반드시 늘 옳다는 것도 아니고, 거리두기를 꼭 고쳐야 할 것도 아니다. 고치려고 해봤으나 고쳐지지 않기 때문에.. 어떤 선배들이나 친구들은 가정이 생기고 우선순위가 조정되면 자연스럽게 고쳐질 것이라고 하나 (그리고 나도 그 이야기에는 동의한다) 나에게 아직 가정이 생겨보지 않았으므로 일어나지 않은 가능성 상태의 상황을 default로 두고 나의 마음을 쉽게 단정 짓거나 상상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어림짐작으로 미리 이럴 것이다 저럴 것이다 생각하며 다시 한 번 현재 내 자신은 도대체 왜 이러냐 자책하면서 괴로워할 필요는 없으니... 설령 미래에 달라진다고 해도 아직 일어난 일도 아니고 그 일어나지 않은 일이 지금의 나를 바뀌는 것도 아니기에 지금 가지고 있는 고민이나 고찰이 아주 의미 없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랜 시간 동안 주변의 선후배 동료들이 어떤 감정을 토로하나 지켜 봤다. 극악한(?) 업무 환경을 대했을 때, 그리고 그 환경이 종료하고 나서 각자가 화두로 끌고 올라오는 주제는 비슷한 듯하면서도 선연히 달랐다. 큰 궤에서는 같았지만, 그걸 어떻게 접근하고 풀어가는지는 서로 다르다고 할까. 물론 이것도 몇 개 유형으로 나눌 수 있지만, 가만히 잘 보면 사람들의 생각이 조금은 다르고, 그리고 가장 먼저 이야기하는 생각도 달랐다. 아마 먼저 이야기하는 것이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었겠지.
어떤 변호사는 끊임없이 일 가정 양립이나 로펌 내 여성 변호사/육아하는 사람의 처우에 대해 말한다. 그에게 극악한 업무환경이 주는 가장 큰 화두는, 내 아이 키우는 것에서 멀어진 것, 혹은 로펌 변호사로서 자신을 갈아 넣기 어려운 주변 환경, 그렇다고 해서 가족도 잘 챙기지 못하지만, 그래도 적당히 성공은 하고 싶은데 조금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듯한 이 주변의 날선 분위기이다. 같은 국면에서 어떤 변호사는 어떻게 하면 좋은 연봉을 받을지를 이야기한다. 이 분들은 이미 로펌에 다니기로 한 순간 라이프를 개선하려는 노력은 크게 의미 없을 거라고 본다. 조금 나아질 수는 있지만 절대적으로 좋아지지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이런 분들은 연봉에 가장 관심이 많다. 가장 높은 연봉을 주는 곳, 나에게 가장 높은 연봉을 줄 곳, 나의 향후 기대소득이 가장 높은 곳은 어디인지, 그래서 EP는 달 수 있는지, 이직을 한다면 그래도 비슷하게 금액 맞추어 주는 곳으로 갈 수 있는지 등등. 이런 거 다 관심 없고 취미 생활의 끝을 본 분들도 있다. 나랑 비슷하게 "일"에 대한 고민이 많은데, 어떻게 하면 평등하게 일이 배분되고 더 힘든 사람에게 일을 덜 하게 되는지, 업무의 분배구조에 관심이 있는 분들도 있다. 로펌 생활에 행복은 없고 그냥 내가 번 돈 재밌게 쓰고 맛있는 거 먹고 예쁜 옷 사 입고 운동하고… 조금 다른 유형으로 학자 스타일이라 연구에 매진하는 분도 있다. 이런 분들은 그냥 다른 곳에서 자아 찾기를 하는 건데, 잘 유지만 할 수 있다면 난 이것도 충분히 재미있고 좋은 삶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다종다양한 사람들의 물결 속에서 나의 화두는 무엇인가. 나의 화두는 그러나 무엇보다, <일을 어떻게 잘할지 - (매우 추상적이지만) 어떻게 하면 일을 잘해서 내가 일을 해야 하는 "장소에 속해 있는 사람들"의 마음에 들고 인정받는지 - >이다. 이게 되게 미묘하고 사실은 실체도 없는 약간 허상 같은, illusionary한 생각이라는 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다. 그런데 그걸 잘 알면서도 “일을 잘하고 싶다”라는 생각을 포기는 못하는 것 같다. (점점 체력이 떨어져서 일이 잘되게 하려는 노력을 못하고 다 놓아버려서, 움켜쥐었던 것들이 스르르 사라져버리고는 있지만서도.) 그래서 자꾸 “일을 잘한다”는 것이 나의 기준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래서 (과거는 차치하고서라도) 앞으로 일을 잘하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 스스로 자꾸 묻게 되는데, 내 기준이 모호하니 내 자신에게 요구할 것도 애매해지고 길이 안보이니 갑갑하다. 나이를 먹으면서 내 자신의 날카로움도 무뎌지고 있는데 (다르게 말하면 성숙한 면도 생기니 좋은 것일 수도 있다. 모든 것은 동전의 양면!) 그렇게 하니까 옛날에 비판하고 가혹하게 바라 보았던 모든 인간 군상에게 좀 관대해지고 이해하는 꼰대의 길로 걸어가고 있으니... 내 자신에게도 좀 덜 가혹하게 되어 살만해지면서 또 동시에 열심히 노력하려는 동력도 떨어졌다는 생각을 한다.
로펌에서 일을 잘하는 척도는 빌링을 많이 하고 돈을 많이 버는 것이니 결국 내가 “돈”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결론이 될 수도 있다. 그런데 내가 생각하는 “일을 잘한다”는 사실 돈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과 약간은 또 결이 다르다. 예를 들어 내가 아주 운이 터져 가지고 엄청나게 이상하고 손 많이 가는 사건을 가져와서 후배들은 다 괴로워하는데 빌링은 짱짱하게 잘 되고 회사에서 돈도 잘 벌고 인정받는다고 해보자. 일을 뭔가 이상하게 하고 있는데 (결과물도 엉성하고 뭐 그럼) 고객을 구워 삶는 능력도 있어서 고객이 불만도 없다. 과정과 결과 모두 로펌에서 아주 좋아할 상황이고, 돈을 잘 버니까 인정도 받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런 식으로 일을 잘하고 싶지는 않은 것 같다. 뭔가 설명하기는 어려운데, 그래도 결과물이 엉성하지 않고, 일을 하는 사람이 “쓸데 없는 일을 하고 있다”라고 느끼지 않고, 그럼에도 돈을 버는 일을 하고 싶다.
세간에 보여지는 명예나 평판과도 조금 다르다. 물론 내가 리딩 로이어, 좋은 유학길, 좋은 평판을 싫어한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굉장히 그런 감투를 좋아하는 것에 가깝다. 그런데 그 세간에 보여지는 평판이나 명예보다도 그냥 작은 공동체에서 작게 인정받고 자존감 채울 때가 내가 더 행복한 것도 같아서. 우쭈쭈를 좋아하는 듯. 늘 친구들에게 말하는 게, 나는 용의 꼬리보다 그냥 닭 벼슬하고 싶다고 하는데, 닭벼슬이면서 둥개둥개 당하는 상태가 스스로 자존감이나 행복이 더 큰 것 같다. 나름 엄격한 기준을 스스로 가지고 있으니 내가 만족하는 방식으로, 그리고 내가 선택한 사람들을 만족시키는 방식으로 일을 잘하고 싶은 그런 이상하게 허상에 차 있는 욕망이 있다.
어쨌든 이런 허상을 좇는 과정에서, 내가 답할 수 없는 문제/모순이 생긴다. 나만 만족하고, 내 주변만 만족하면 그게 돈이 되나? 시장의 평가는? 결국 자선 사업도 아니고 영리 목적의 사업을 하는 것인데 뭔가 정신줄 빼어 놓고 다른 데에만 집중하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가끔은 객관적인 알맹이보다 내 만족을 위해 더 많은 스트레스를 받는 경우가 있다. 그렇다면 내 만족은 과연 누구를 위한 만족인가? 조직도 생물이라서 계속 커지는데 (특히 로펌과 같이 피라미드 조직이면서 딱히 생산설비 추가해서 양 늘리는 게 아닌 조직은 나도 성장해야 밑의 후배도 막지 않고 선후배 보기 안 민망하다), 나의 욕구는 너무 저차원적인 욕구는 아닐까?
허상에 대한 추구와 모순적인 생각이 진득히 들러붙어서 회사 다닐 때 꽤 많이 괴로웠다. 어떤 날은 이런 고민이 다 해결된 것 같다가도, 어떤 날은 어떤 광경을 보면 내가 생각한 것과 달라서 또는 내가 생각한 그림이 이런거였나 싶어서. 또 다른 날은 내가 허상을 좇고 있네 싶어서. 일을 잘하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왜 어떤 일을 잘했다고 느낄까? 그 일을 잘하는 것이 나의 수익성과는 어떻게 연관이 되는가?
이런 고민을 뒤로 하고 유학길에 오르면서 (놀고 싶어서 올랐지 뭐), 돌아가서 1-2년만 딱 이 꽉 깨물고 해보고, 아니면 과감하게 접어버리자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어떤 일들은 부딪혀야 더 설명이 잘되는데, 아직 어쏘로서의 경험밖에 없어서 온실 속의 고귀한 화초로 자라버린 나는 내 기준의 일 잘함과 사회적 가치평가와 수익성을 연결시킬 고리가 없고, 내가 이 다이나믹에 어떻게 반응할지도 알 수 없어서. 아직 조직 “내부”의 모습밖에 볼 수 없는 내가 자연스럽게 생각만으로는 연결짓기에 어려운 주제라는 생각을 한다.
그래도 “일잘함”이 결국 내 화두인데, 내가 그 화두를 계속 고민해도 괜찮고 “일”하느라 인생의 시간을 죄다 써버리고 있는 로펌 변호사인 점은 그나마 참 다행인 것 같다. 어쨌든 인생의 시간을 가장 많이 쏟고 있는 “일”에다가 가장 많은 고민의 지분을 드리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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