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WORK/나의 변호사 생활기: jot down

여백서원을 방문하고 나서

by 적일행 2021. 5. 10.

5월 1주 내내 합병 일정 하나가 꼬여서 스트레스를 엄청나게 받았다. 고작 날짜 하루를 잘못 센 것인데 고작 하루 잘못 세었다기에는 일이 객관적으로 많고 아주 복잡해서 매일 밤을 세우고 이런 건 아니었는데, 업무 시간에 계속 전화를 받아야 하고 해결책은 뾰족히 안 보이고 결과적으로 머리 싸매고 이러니 저러니 고민하느라 시간을 온통 지새웠다. 고작 날짜 하루 잘못 세서 벌어진 일이었는데, 내 잘못이고 내 잘못이로소이고 또 잘 해결될 것 같아서 다행이긴 한데 동시에 몹시 매우 많이 괴로운 것은 또 어쩔 도리가 없다.

 

꽁기꽁기한 마음가짐으로 한주를 꾸역꾸역 살아내고 나니, 하루에 수면 시간이 평균 4시간도 채 되지 않았다. 타임이나 많이 나오면 억울하지나 않지....도저히 못견디겠어서 금요일 오후에 드디어 내가 할만큼 할 도리는 다했다(+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다행히 보인 덕도 있음)는 생각이 들자, 얼마 안 남은 반차라도 바로 소진해야겠다 싶었다.

 

마침 officially 백수 겸 대학원생, unofficially 풀 뽑으러 다니는 파워 제초러께 연락을 드렸더니, 대학 시절 독일 명작의 이해라는 수업을 들었는데 그 담당 교수님이신 전영애 교수님이 여주에 크고 멋진 서원을 지은 상태라고 해서 거기에 가보기로 했다.

 

여백서원의 경치는 아름답고도 멋졌다. 푸르고 계속 바라보면 기분이 좋아지는 경치였다. 약간의 술을 탄 홍차와 커피도 너무 좋았다. 푸른 나무를 바라보자, 나무가 흔들렸다. 선생님이 여기는 나무 고아원이라고, 저기 저 나무는 서울대 하수구에서 자라던 느티나무를 옮겨 심은 것이고 저기 저 나무는 또 누가 심은 것이고, 한참을 설명해주셨다. 공간 하나 하나에 대한 노력과 애정이 느껴졌다. 뒷뜰도 구경하고, 푹푹 꺼지는 땅을 밟다가 한 번 넘어지기도 했다. 한참 별 시덥지 않은 주제들로 수다를 떨었다. 풀과 물과 선생님이 독일에서 짊어지고 오셨다고 한 풍경소리와 그 모든 것이 꽉꽉 들어차 있었다. 미세먼지가 몹시 심한 날이었는데, 그래도 여주의 공기는 조금 더 맑은 기분.

 

입을 뻐끔뻐금하는 물고기들과. 공간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 나의 취향을 어떻게 시간과 돈을 들여서 가꿀 것인가. 이런 큰 집은 사실 조금만 시간이 없어도 꾸미기 어려워 지는데, 어떻게 계속 이걸 유지하시는지 신기할 따름.

 

가장 크고 아름다웠던 홀 겸 서재 공간. 아주 먼 옛날 살짝 훑어만 보았던 괴테의 파우스트 번역서도 발견하고, 여러 책들이 어지러이 얽힌 장면을 보았다. 장면들을 보다보니, 좋은 서가란 무엇인지 좋은 취향이란 무엇인지에 관한 생각을 하게 된다. 공간 가득히 느껴지던 피톤치드와 진흙냄새, 그리고 밝은 조명에 이르기까지...... 무엇 하나 허투루 한 것이 없고 그 무엇도 신경쓰지 않을 수가 없던 공간들이었다. 

 

내 취향을 아는 것은 의외로 쉬울 것 같지만 의외로 어렵다. 머릿속으론 이럴거야-라고 생각하지만 경험해보기 전까지는 그 취향이 내 취향이 맞는지 확언할 수 없다.  결국 많이 경험하고, 많이 느끼고,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나의 한 바탕 취향이 완성되는 것인데....이런 취향들을 테스트하고 맛볼 시간을 스스로에게 주어야지. 매몰되지 않고 균형감각을 가져야지.

'WORK > 나의 변호사 생활기: jot down' 카테고리의 다른 글

흥미로운 인터뷰 - VC 이끄는 MZ 세대  (0) 2021.08.02
동기福, 선배福, 후배福  (0) 2021.06.11
6년차 단상2  (0) 2021.05.14
6년차 단상1  (1) 2021.03.10
결국 휴직을 했다  (0) 2021.03.01
토스능력과 capacity  (0) 2020.04.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