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처음 여기에 올 때는 여러 종류의 글을 남겨야지! 라고 생각했다. LLM 정보는 다 너무 알음알음 전해지다보니까, 정보글을 남겨야지라고 생각도 한 것 같다.
그런데 나의 창조성 내지 창의성은 여유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부정(negative)에서 나오는 경우가 너무 많아서, 여기 오자마자 모든 걸 뒷전으로 팽개치고 꽤나 놀기만 했더니 창조하고 싶은 욕구가 뚝 떨어졌다. 매일매일 여행 계획 세우고, 소소하게 운동하고, 소소하게 리딩하다 포기하고, 그냥 넷플릭스만 주구리장창 틀어놓고 누워서 영상만 보다가 하루가 다 가기도 하고.... 여기서 성적 잘 받아야 겠다는 스트레스도 하나도 없으니 (오기 전에 스스로 그냥 "P"에 만족하자고 생각하고 옴*) 스트레스 요소가 거의 없는(...), 그리고 생산성도 거의 없는(...) 상태의 내가 되었다. 물론 성격이 급해서 미국식 느긋함을 대할 때마다 갑자기 스트레스 게이지가 쭉 올라가긴 하지만, 상시적 스트레스 상태였던 로펌 생활 때와는 천차만별인 느낌.
*번외* 하버드 로스쿨은 성적을 LP(low pass), P(pass), HP(High pass), DS(Dean's student)로 나눈다. 그리고 성적표에 평점이 안 나온다. 패스를 못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는데 그런 경우는 정말 드문 것 같고, 1학년 수업 아니고서는 LP도 매우 드문 듯 (내가 공부를 안해도 해도 전부 다 P인 점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그러하다!)
오기 전에 계획은 여러 저러 네트워킹을 하자는 것이었는데, 미국식 네트워킹에 익숙치 않은 것도 있고 (이제야 겨우 링크드인 활용하고 동아리도 나가보고 있음), 한국식 네트워킹을 하자니 여기서 만나는 한국 분들은 다 미국 영주권을 취득할 생각이 커서 나와 니즈(needs)가 다른 것도 크다.
결국 LLM 친구들과 친하게 지내는 것에 그치게 되었는데, 뭐 장기적으로 보면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너무 따스한 친구들도 많구, 여러 경험한 친구들도 많고, 진짜 똑똑한 애들도 많다 보니까 글로벌한 인맥을 형성했다는 점에는 큰 의의가 있는 것 같다) 한국에서 생각했던 갑갑함이나 갈증을 확 풀어줄 수 있는 류의 네트워킹은 아니게 되었다.
LLM을 가는 데에는 여러 목표가 있을 수 있다. 대표적으로 (1) 외국에서 공부를 더 해서 academic하게 발전시킨다(나의 경우는 절대 아니었고....박사논문도 못쓰고 있는데), (2) 현지에 취업한다(이것도 나에게는 선택지가 아니었다. 난 내가 외국 살면 엄청 스트레스 받을 것임을 잘 안다.), (3) 쉰다(많은 로펌 변호사들 - 특히 육아중인 분들 - 의 선택지. 이것도 오롯이 내 선택지는 아니었는데 결과적으로 ㅋㅋ이걸 선택한 사람처럼 살고는 있다.) 등이 있을 것인데, (4) 나의 경우 아주 살짝(중요함) 네트워킹을 하고 미국 법조 문화는 어떤지 경험해본다는 정도의 작고 소박한 목표가 있었다. 그런데 (4)의 목표를 세워놓고 정작 내 자신이 미국식 네트워킹을 하기엔 귀찮고 부끄러워서 열심히 못한 것도 같아서 아쉽기도 하면서, 이정도면 고생했고 이보다 더 열심히는 못했으리라 싶기도 하다(양가적이네..).
한국에서 로펌의 유학 연차가 다 되었을 때에는 내 자신의 부족함을 많이 생각하게 되었던 것 같다. 어쏘 시절의 나(특: 지금도 어쏘임)를 돌아보면 일을 제일 잘한다고는 못해도 그래도 꽤 회사에서 인정 받으면서 다닌 편이라고 생각하고, 그래도 같은 회사 내에서 동년배 변호사들에 비해 크게 부족하다는 생각은 안했던 것 같다. 그렇지만 동시에 (이제는 늙어버렸으나) 생각보다 어린 나이, 인맥의 부재, 고객 마케팅이나 네트워킹할줄 모름 등의 요소가 회사 내에서 날 불안하게 만드는 주요 요소였던 것 같다. 파트너도 되기 전에 생각할 필요가 없었을 지도 모르겠지만, 파트너로 롤이 바뀌면 내가 어쏘 때처럼 내 자신이 만족하는 종류의 일의 퀄리티를 뽑아내서 되는 것이 아니라는 류의 생각이 정말 강하게 들었다. 롤이 바뀌었는데 잘 못하면 후배들 보기에도 민망하고 내 자존심도 상할 것 같고(지금 생각하면 그깟 자존심이 무슨 소용이리요).... 어떻게 하면 내 고객이 생기지? 어떻게 하면 내가 고객만족을 줄 수 있지? 이런 불안감이 항상 있었는데, 그 불안감 때문에 처음에는 LLM을 나오기 싫었던 것 같다. 미국 온다고 그게 생길 것 같지가 않아서...다시 생각해보면 한국에서 1년 있다고 그게 생길까 싶기는 한데, 여기 와서 보다는 나을 수도 있을 것 같기도 하고.
다만 여기 와서는 회사와 한국 사람들(동료들과 고객들 - 물론 난 동료들을 좋아하지만 그것과 별개로!)하고 다 강제적으로 멀어지다보니까 정신적 고통에서 좀 멀어지고 좀 가볍게 이런 이슈들을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큰 장점인 것 같다. 워낙 다른 나라에서 온 LLM들이나 여기서 만나는 모두가 이직을 시도하고 있기도 해서, 이직이나 다른 길로 가는 것에 대하여 좀 더(라고 쓰고 진짜 많이) 가벼운 마음을 갖게 된 것도 있다. 종종 수업에서 명사(?!)를 초대해서 career path 등에 대해서 이야기해주기도 하는데, 당연히 한국에 적용할 만한 것이 아닌 경우도 많지만 뭐랄까 커리어에 대하여 좀 무거운 마음을 덜 수 있게 해준 것이 큰 것 같다. 매번 부담스럽게 바라볼 필요 없이 좀 더 가볍고 산뜻하게 바라보는 시각을 가지게 되었달까.
그래도 스스로를 위한 변명을 좀 해보자면, (1)을 좀 해보려고 굳이굳이 시간표 바꾸어 가면서 employment law 수업을 들었다. 누가 보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고 할 것 같지만, 나름 시간표 다 뒤집어 엎고 고민이 많았는데 얻는 것이 좀 있는 것 같아서 (그리고 나 자신의 academic한 부분을 자극하는 지점이 많은 수업이라서) 정말 만족스럽다. 물론 공부를 정말 제대로 하는 친구들은 1학기부터 열심히하고 SJD나 scholarship을 준비하는 것 같기는 하지만, 나는 이미 지친 상태라 이정도의 의욕과 호기심을 되살린 것에 만족. (3)을 더 열심히 했어야 하는 것 같기도 한데, 미국 살면서 운전도 못하고 골프도 안치는 나는 이정도 쉰 것으로 충분한거 같기도 하고.
아무튼 두서없이 LLM을 돌아보게 되었는데(도대체, 갑자기, 왜?) 졸업이 100일도 안남은 시점이 되었으니 아무래도 원래 계획했던 글들을 하나하나 차근차근 써나가게 되지 않을까도 싶다. 이제 더 이상 생산적인 일들을 미룰 수가 없기 때문에 그간 없었던 툴툴거림이 튀어나올 것 같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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