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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UDY/나 LLM 갈 수 있나요

감사함과 간사함의 사이에서

by 적일행 2023. 6. 15.

좀 규모가 있는 로펌, 검찰, 법원 등 법조인들은 1년간 연수 기간을 가진다. 예전에는 미국 LLM 일변도였다면, 한국이 성장하여 수많은 미국 유학생을 배출하고 있는 요즘은 좀 다양하다. 그냥 아예 쉬는 것을 목적으로 미국 visiting을 하는가하면, 유럽이나 일본, 호주, 싱가포르 등 다른 나라로 가는 경우도 있고, MBA에 도전하는 사람도 있다고 하고, 국내 대학원에서 학업 마무리하는 분들도 있고(정말 대단하고 존경스러움), 육아에 매진하기 위하여 적당한 자리를 찾아가는 분들도 있다. 모습도 다양하고, 기간도, 혜택도 천차만별. 1차적으로는 로펌의 비용 줄이기라는 측면이 있을 것이고 (과거와 같이 로펌 변호사가 소수가 아니니 모두를 미국 보내주었다가는 비용이 어마어마하겠지), 2차적으로는 새로운 세대의 변호사들은 더 이상 미국 살이에 목매달지 않게된 것도 있을 것이다. 아이가 어릴 때 미국 유학을 가서 아이에게 영어를 가르쳐줄 유인이 컸던 윗 세대 선배들과 달리, 요새는 싱글도 너무 많고 아기가 너무 어려서 애매한 경우도 많다. 

 

1년의 쉼표를, 돌아갈 직장이 있는 상태에서 (물론 가자마자 퇴사각 드르렁 재는 사람도 많지만) 맞이한다는 것은 참 감사한 일이다(취직 안된다고 초조해할 필요가 없으니까....). 다른 나라 LLM들이 바쁘게 지내는 동안 아무것도 안했다고도(?) 할 수 있다. 막상 LLM을 나올 때는 1년이란 기간이 길어보이니까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이런 저런 목표와 계획을 세우게 된다. 1년 지내본 경험은 1년은 너무 짧고 할 수 있는 것도 별로 없다. 날씨 안좋아서 며칠 집에 누워 있고 이러면 1달이 순삭. 갈때가 되니 더욱 뼈저리게 느껴진다. 

 

공부를 열심히 했는가? 기준치가 높아서가 아니라 안했다고 할 순 없지만 정말 했다고도 할 수 없다(올 때 논문 주제 생각해보겠던 사람 누구더라...처음에 깔짝 찾아보다가 바로 포기함). 수업은 다 나갔고 리딩은 절반 이상은 한 것 같지만(몇몇 과목은 아예 안하고 몇몇 과목은 열심히 함) 기말 공부하며 기출을 미리 풀지도 않았고, 노트 한 3-4번 읽고 그냥 시험 들어간듯. 마케팅에 필요한 행위를 많이 했는가? 한국 사람들을 만나서 안 논것은 아니지만 적극적으로 인맥을 쌓았다고 보기는 어렵고, 그렇다고 골프를 친 것도 아니고 (미국와서 골프 안치는 변호사 드문데 그게 바로 나인 듯), 운전도 여전히 못한다(캘리였다면 열심히 했을까?). 운동이라도 열심히 했는가? 여행 다니다가 체력 다 빠져나가버려서 운동도 드문드문했다. 로펌다닐 때만큼..그니까 딱 생존할만큼 한듯. 여행은 많이 다닌 것 같고 (그런데 이건 코로나 때문에 여행을 못가서 사람이 좀 미쳐 있을 때라), 술은 한국보다 더 많이 먹은 것 같다

 

싱글에 부양의무도 없는 내가 이런걸 보면, 내가 게으른 것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이 기름을 다 태우고 와서 그냥 가만히 누워 기름을 채우게 된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고. 이런 저런 연수를 하면 도움이 조금이라도 될까 고민했던 과거가 무쓸모했다는 생각도 든다. 어차피 이렇게 LLM와서 academic / career acheivement 없이 (합법적으로?) 놀다가 가는걸. 대신 일과의 거리두기는 확실히 되어서 - 일 어떻게 했는지 다 까먹어버렸다는 단점은 있지만 - 뇌가 클린해진 느낌은 든다. 생각보다 일이 없어도 내가 procrasinate하는 사람이고 내 머릿속 나보다 내가 게으른 사람이라는 점을 많이 배운 한 해였다. 예전엔 어떻게 부지런했지? 

 

간사한 마음이 드는 것은, 아 벌써 돌아가야한다고? 난 좀 더 놀 준비가 되었는데...싶은 마음이랄까? (게다가 여기 나와 있으면 LLM 말고 2년짜리 학위 과정이 많아서인지, 아 왜 LLM은 1년짜리를 만들어가지고..라는 생각을 자꾸 하게 됨ㅋㅋㅋ) 아직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못 받아들이겠고, 반년 정도 더 놀면 좋을 것 같은데라는 생각을 매일 한다. 그러나 stipend를 받았으니 조용히 돌아가야겠지. 엉엉. 이상 점심약속 전에 배고파서 땅콩바나나 샌드위치 & 커피 소비하며 한 잡생각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