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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K/Working Smarter: Tips

리서치는 "왜" 하나?

by 적일행 2020. 2. 14.

어떤 일에 초~ 집중하고 나면 이걸 왜 하려고 했는지 까먹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냥 그 일에 매몰되어서 그 일을 왜 하려고 하는지 큰 방향을 잃어버리는 것이지요. A를 사러 나갔는데 세일하는 B에 집중해서, A 사려 한 것은 까무룩히 잊어버리고 B만 사고 오도카니 돌아올 때가 있습니다. 바로 리서치를 할 때 그런 일이 정말 많이 생깁니다. 뭘 찾으려고 했는진 잊어버리고, 리서치 그 자체에 푹 빠져서 매몰되는 것이지요. 

 

 

리서치는 정의상 어떠한 주제에 대한 '조사'를 의미합니다. 학교 다닐 때 법률 정보의 조사라는 과목이 있었는데, 참 수박 겉핥기 식으로 법률 정보를 조사할 수 있는 여러 사이트들을 소개해주었습니다. 그 과목에서 배웠던 여러 사이트, source들을 잘 뒤져서 원하는 정보를 찾아내는 것이 리서치입니다. 키워드를 잘못 설정하면 구글 16번 페이지에서야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으므로 센스도 굉장히 많이 필요합니다. 통상 변호사들이 리서치라고 할 때에는 다음과 같은 사항이 (명시적으로) 포함됩니다.

 

  • 특정 법적 이슈와 관련하여, 그에 관한 법률, 시행령, 시행규칙 기타 하위규정 [규정], 판례 [대법원~하급심 순], 비교적 공식력 있게 쓰인 주석서(예를 들어 소위 주요법이라고 불리는 민법/헌법/형법/상법 등에 관한 주석서, 그래도 꽤 여러 학자/실무가들이 모여서 의미있게 쓴 노동법, 자본시장법에 관한 주석서), 교과서(각 분야별로 '통설' 혹은 '권위 있음'이 인정되는 교수님 순서), 논문(법학 논문은 인용횟수도 중요하지만 저자나 출처가 중요할 때가 더 많은 듯합니다), 다른 사례들을 꼼꼼히 뒤져보기

  •  잘 뒤진 것들을 구슬로 잘 꿰어 보기

 

 

그러면 리서치는 왜 할까요?

 

변호사들만 보는 것 같은 신문인 "법률신문"에는 2015년 당시 김앤장에 재직 중이던 김재헌 변호사라는 분의 "시니어 노트"라는 칼럼이 있습니다. 글만 보면 김재헌 변호사님 본인도 매우 훌륭하신 분 같고, 업무 내용이나 태도에서 이거 였구나 하고 무릎칠 좋을 글도 많습니다. 제가 꼰대미 넘치는데 저조차 놀랄만한 글도 물론 있습니다. 그 중 2015. 7. 27.에 글쓰기 능력 향상 관련된 글에는 다음과 같은 부분이 나옵니다(전문은: https://m.lawtimes.co.kr/Content/Opinion?serial=94599).

 

첫째, 정보수집 단계이다. 1년차에서 3년차까지가 여기에 해당한다. 이 단계에서는 변호사들이 열심히 자료를 검토하여 많은 정보를 수집하고 이 정보들을 바탕으로 글을 쓴다. 그런데 아쉽게도 이들에게는 아직 정보들을 정리하거나 분석할 역량이 없다. 이들의 글은 대체적으로 구성이 엉성하고 논리도 명쾌하지 않다. 이들이 작성한 문서를 보면서 선배들은 휴지통에 던지고 싶은 충동에 자주 빠진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속담이 공감이 되는 단계이다. 그러나 좌절할 필요는 없다. 이 단계에서는 무조건 정보수집을 열심히 해야 한다. 다음 단계로 가기 위해서 말이다.

 

여담인데 아마 대한민국에서 제일 큰 규모인 김앤장이어서 "무조건 정보수집을 열심히 해야한다"만 적용될 수 있는 기간이 3년차까지인 것 같습니다. 솔직히 말씀 드리면 더 작은 집단으로 갈수록 "정보수집만" 열심히해도 되는 단계는 점점 줄어 들고, 정보 수집은 1-2년차 이후로는 당연한 것, 그것만 더 여유롭게 집중할 수 있는 시기는 금방 끝납니다. (운좋게 선배가 수두룩 빽빽하게 있는 팀에 들어 갔다면 그 기간이 길겠지만, 그게 변호사로서의 성장에 좋은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김재헌 변호사님이 명시적으로 말씀하시지는 않았지만 글의 논조에서 "리서치"가 글을 위한 과정임이 드러납니다(위 글은 제목부터 " 변호사의 생존무기인 글쓰기 능력을 향상하자"고 하면서, 그 방법 중 하나로 리서치를 들고 있습니다.) 결국 "리서치"는 글을 쓰기 위한 단계입니다. 글은 그 서면의 종류에 따라 다르겠지만 고객의 궁금증을 시원하게 긁어주고 고객이 원하는 결과를 얻게 해주는 변호의 무기이고 수단입니다.  질의를 어떠한 맥락에서 했는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질문" 그 자체에만 천착한 리서치는 정말 나쁜 리서치입니다. 고객이 법을 잘 몰라서 rough하게 이런 취지로 질문한 것인데, 딱 봐도 rough한 질문을 더 알아볼 생각은 하지 않고 "이렇게 말했으니 이렇게만 찾으면 돈받고 할만한 일 한 거지"는 변호사가 쏟아져 나오는 이 시장에서 밀리기 참 손쉬운 태도입니다. 고객의 의도가 명확하지 않으면 그것을 묻고, 비법률적 언어로 여러 쟁점이 뒤섞여 있는 질문을 재구성하여 쟁점들을 살살 잘 발라 내서 풀어써야 합니다. 뭉쳐져 있는 진흙덩어리에 포함된 여러 보석이나 물건들을 물속에서 살살 흔들면서 채취하는 과정 같습니다. 고객 질문에 O/X로 답하는 것도 중요한데, 사안에 따라서는 "대안"도 리서치해주면 누구나 좋아하는 변호사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도 1년차 변호사에게 명시적으로 말하지 않지만, 암묵적으로 1년차를 제외한 변호사들이 리서치와 관련하여 알고 있는 사항이 참 많습니다. 1년차를 제외한 사람들은 아래 사실을 외면하고, 1년차는 아래 사실을 눈치 못채서 도대체 선배가 어디가 불만인지를 모릅니다

 

- 리서치를 해달라고 했을 때 완결된 글을 원한다기 보다는 풍부한 논거가 붙은(유사사례의 장단점 비교나, 글에 완전히 포함되지 않더라도 사안의 이해를 도울 수 있는 내용들) 모종의 문서를 원한다고 느낄 수 있고, 또 시키는 사람도 사실은 그것을 의도한 경우가 많습니다.

  • 그러나 당신이 선배에게 바로 "~함", "~음"을 "~합니다.", "~입니다." 정도의 짜임새 있는 리서치 메모로 줄 수만 있다면, 선배는 당신과 사랑에 빠질 겁니다. 제일 좋은 후배는 재미있는 후배도, 인격이 훌륭한 후배도 아니오 그냥 내 일 덜어주는 사람이 짱입니다. (다른 글을 통해 말씀 드리겠지만, 우리나라 변호사 시장은 노동집약적이다보니 - 다른 나라도 그럴 지도 모릅니다...다녀보질 않아서..- 로펌의 다니는 변호사 대부분은 돈도 돈이지만 시간이라는 희소한 재화를 가지고 고군분투하고 있습니다.) 제가 선배에게 들었던 조언 중 하나는 단순히 내용만 정리하지 말고 우리 사안과 비교해서 아이디어/논리도 만들어 보라는 것이었습니다. 메모만 보고 바로 써먹게 주는 사람이 최고 사랑 받습니다. 이건 고객과의 관계에서도, 그 누구와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 선배와 사랑에 빠지는 것이 좀 부담스럽기는 하지만, 내 리서치 메모를 가지고 내가 한 번 글을 써보세요. 물론 아마 청구할 수도 없을 것이고 바빠 죽겠는데 의욕도 안 생길 겁니다(선배가 요청한 일도 아니고, 고객이 요청한 일도 아니니 청구가 어렵고 생색내기도 그렇습니다. 선배 입장에선 후배가 준 걸 바탕으로 내가 쓰는 게 나으니까 교육적 목적으로/혹은 노가다성 업무가 필요해서 리서치를 시킨 것이지 글까지 써가면 리서치도 잘 못했으면서 시키지도 않은 일 했다고 괜히 쿠사리 먹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내 메모 가지고 내가 써보면 압니다. 아 - 내가 남이 쓴다는 생각 때문에 메모에 구멍이 많은데 막 넘어 갔구나, 막상 논리를 전개해보려니 이 부분이 더 필요하구나. 한 번 꼭 해보세요. 진짜. 제가 안해봐서 나중에 글 쓰기 시작하는 단계에서 많이 괴로웠습니다. 

  • 같은 맥락에서 리서치가 잘 안되는 경우에는 무작정 서면을 먼저 쓰기 시작해보세요. 어디가 필요한지 명확해지는 효과가 있습니다. 

- 변호사는 고객을 위해서 일하지만 1년차 변호사의 고객은 실질적으로는 랜선 밖에서 만날 수 있는 팀장님/부장님/전무님/대표님이 아니라 나에게 리서치를 시킨 선배입니다. 

  • 납기 못 지킬 것 같으면 빨리 자백하세요. 그래야 수습도 빨라져요. 

  • 당신만 알아보는 리서치는 최악입니다. 남이 알아보기 어려운 결과물을 내는 변호사는 협업의 자세가 안되어 있고 다른 사람들도 일 주기 싫어 합니다. 리서치는 결과물 그 자체로 당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상대방에게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설령, 당신이 이래저래 찾아봤는데 결론을 모르겠다고 하는 부분일지라도 당신이 결론을 모르겠다는 점 자체를 명확히 할 필요는 있습니다. 

- 쟁점에 대해서 논문쓰거나 교수가 되려는 것이 아니라면, 실천적인 해결책을 도모하고 / 과도하게 현학적인 쟁점이거나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 부분은 과감하게 생략하는 리서치도 큰 도움이 됩니다. 화딱지 나는 리서치 중 하나는 한참 판례들이나 정리된 내용들을 다 읽었는데 "그래서 어쩌라고?"라는 생각이 드는 리서치입니다. 법조문, 판결문 그대로 붙여 놓은 리서치(함의를 분석하지 않은 리서치)는 굉장히 이상한 리서치입니다. 선배도 법조문 번호보고 법조문 자체를 찾을 줄은 압니다. 

 

선배들이 미쳐서 심심해서 리서치를 시킨 것이 아니라는 점을 잊지 않은 것만으로도, 1-2년차때는 충분히 좋은 변호사로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선배는 "사안의 해결"을 위하여 리서치를 시킨 것입니다. 리서치를 하다보면 특정 법률 쟁점에 꽂힙니다. 실천적으로 도움이 될 때도 있지만, 결론에 하등 영향이 없을 때도 있고 이러한 학설을 장황하게 설명해봐야 고객은 못 알아 듣는 경우도 있습니다.  풍부한 리서치는 중요하지만, 리서치를 하다가 법률 쟁점 그 자체의 재미에 푹 빠져서 이 리서치를 "왜" 시작했는지 잊어 버리는 것은 큰 실수입니다. 특정 주제나 쟁점에 매몰되어 큰 숲을 못 보고 있을 것 같을 때마다 스스로 fresh eye로 다시 조망하려는 노력은 해보아야 합니다. 

 

물론 이 글을 쓰는 저도 잘 안되어서 현학적인 쟁점에 빠져서 혼자 헤엄칠 때도 있고 미룰 때도 많습니다. 지금 이순간도 미루는 중입니다. 이젠 그럴 때마다 이 글을 보면서 정신 다잡아야 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