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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속도와 방향/편식성 독서

밀리의 서재 - 어서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

by 적일행 2022. 2. 12.


시간을 보낼 때에는 따뜻한 이야기가 가득한 소설이 좋고, 큰 갈등 없이 잔잔한 소설이 좋다.
요즘 사람 MZ를 이해하자고 많은 책들과 계발서가 나와 있지만, 이런 소설들에서 그려지는 여러 사람의 모습이 오히려 요즘 사람들 - 소위 MZ - 을 더 잘 이해하게 해주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왜 등장인물들이 그런 선택을 했는지 이해하고 있다면 (비록 내 서사가 아니더라도 왜 그런 선택을 하는지 알겠고, 그들의 방황에서 익숙함을 느끼고 내 주변 사람들의 모습을 잘 찾아낸다면) 그게 바로 MZ를 잘 이해한거지뭐.

읽는다는 행위는 많은 노력을 요한다. 특히 매일 수많은 감정 없는 문자들을 해독해내고 혹시 거기에 잘못된 것은 없나 곤두선 기분이 드는 나같은 인간에게 쉴 때까지 의미를 찾아가며 텍스트를 소비하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듯. 그렇지만 나도 영주처럼 결국 활자 인간이라서, 그럼에도 텍스트를 소비하지 않을 순 없어서 중국 웹소설에 빠져들었다가 최근에 간신히 빠져나온 참. 근래 들어서는 읽는 감각을 회복하고 나와 책이 다시 화해하는 기분이 들게 하는 책을 만나기가 많이 힘이 든데, 내가 몰입하지 않아서인지, 단맛에 길들여지면 곶감이 안 단 것처럼 자극에 길들여져서인지, 아직 내 기준에서 좋은 책을 못 만나서인지는 잘 모르겠다. 이 책도 겨우겨우 힘들여서 조금씩, 어떤 챕터는 그냥 건너 뛰기도 하면서 그렇게 읽었다.

가장 힘든 순간은 지나간 이후여서인지, 책의 모든 구절에 다 마음 아파하지도 않았고, 읽으면서 맞아 나도 이럴 때가 있었지 내지는 이렇게까지 생각하나 라는, 조금은 감성적이고 공감하면서도 조금은 거리를 둔 생각들을 했다. 몇 가지 문장은 나에게는 너무 많이 은근하지 않고 대놓고 감정을 강변하는 느낌이라 약간은 묘가 떨어지는 기분도 들었다. 이 사람의 감정선은 이런 것입니다 - 라고 하나하나 꼭꼭 씹어서 체하지 말라고 알려주는 느낌이랄까.

마음에 들었던 구절 몇 개.

그냥 요즘엔 그런 생각이 많이 들어요. 나라는 존재가 나에게나 좋지 남에게는 정말 영 아니다, 라고요. 가끔은 나라는 존재가 나에게도 썩 좋지 않긴 한데, 그래도 참을 만은 하거든요, 난.

영주와 지미의 맥주 타임 중 영주의 대사. 간혹하는 상상 중에 하나인데 - 세상에 이렇게 일 못하는 직장 동료와 상사에 대한 분노와 짜증 글이 잘 팔리고 모두가 여기에 공감하면 - 도대체 일을 못하는 사람이 있기는 할까? 벌어서 먹는 것이 무엇인데, 왜 서로에게 분노하고 있지(아 밥벌이의 엄중함)류의 상상을 해본다. 또 다른 상상중 하나로 나는 나를 좋아하는데, 나는 남에게는 별로일 수도 있고 영 아닐 수도 있는데, 모두에게 좋은 건 마더 테레사 급 성인 뿐인데, 예수님도 미움을 받는데, 이런 류의 생각을 간혹 해본다. 그런 생각의 지점들이 응축된 기분이 들어서 좋았다.

저는 가끔 제가 쓸모없는 인간인 것처럼 느껴져 절망하곤 해요. 특히 저에게 호의를 베풀고, 관심을 주고, 사랑을 주던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들었을 때 이런 생각이 많이 들어요. 주변 사람들을 불행하게 하는 사람만큼 불필요한 사람이 있을까, 나는 기어코 타인에게 상처를 주고 마는 사람인가, 나는 겨우 이 정도의 사람인가 싶어 마음이 마비가 돼요.
마비 끝에 나는 그저 평범한 사람이라는 결론에 다다르곤 해요. 아무리 애를 써서 나아가려 해도 종착지는 평범한 인간일 뿐인 거예요. 평범한 인간종에 속하는 나는 불가피하게 타인을 슬프게도 아프게도 하는 것일 뿐이라는. 우리는 웃음을 주고받는 동시에 아픔도 주고받을 수밖에 없는 거라는.

영주의 블로그 중.늘 민페를 걱정하는 친구들에게 전해주고 싶은 말.

그런데 그냥…… 꿈이 다가 아니라는 느낌이 들어요. 꿈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도, 꿈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도 아니지만, 꿈을 이뤘다고 마냥 행복해지기엔 삶이 좀 복잡하다는 느낌?

이건 약간 디즈니의 최근 만화 소울과도 일맥상통하는 느낌. 늘 대단하고 거창한 꿈은 없지만 그때그때 주어진 건 대충할 수없어서 왜 그러고 사냐고 하면 할말이 없는 내가 늘상하던 생각(절대 내가 꿈이 없어서는 아님)

해보기 전에는 아무것도 알 수 없는데. 그러니 무슨 일을 해야 할지 미리부터 고민하기보다 이렇게 먼저 생각해봐. 그게 무슨 일이든 시작했으면 우선 정성을 다해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 작은 경험들을 계속 정성스럽게 쌓아나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

잘 알고 있으나 늘 실천은 잘 되지 않는 지점. 매 순간 최선을 다하면 좋아하는 것을 발견할 수도 있고, 아 내가 생각과 달리 이런거는 싫어하는 구나 취향을 발견하기도 하고. 생각만으로 안되는게 사람이니 부딪혀 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 혼자 끙끙 앓고 있어봐야.

영화를 보다 보면 가끔 너무나 당연한 것들이 깨달음으로 다가오곤 했다. 오늘도 민준은 이 당연한 깨달음에 약한 전율을 느꼈다. 처음 사는 삶이니 그렇게나 고민을 했을 수밖에. 처음 사는 삶이니 그렇게나 불안했을 했을 수밖에. 처음 사는 삶이니 그렇게나 소중했을 수밖에. 처음 사는 삶이니 우리는 이 삶이 어떻게 끝을 맺을지도 알 수 없다. 처음 사는 삶이니 5분 후에 어떤 일을 맞닥뜨리게 될지도 알 수 없다.

카르페디엠적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건 아닌데 누구에게나 이 삶은 처음이고 서툴 수 밖에 없어서 남에게 관대하자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해본다.